형법상 간첩죄 처벌 대상을 ‘적국’은 물론 ‘외국’을 위한 간첩행위로 넓혀야 한다는 논의는 학계와 국회 등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다. 북한과의 휴전 상황, 냉전 당시 중국과 소련 등 공산권 국가를 염두에 둔 관련 조항이 1953년 형법 제정 이래 70년 가까이 이어져 오면서 다변화한 국제정세를 담아내지 못해서다. 그동안 간첩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법안은 수차례 발의만 됐을 뿐, 정치권의 무관심 속에 국회에서 번번이 자동 폐기됐다.
은밀하게 자행되는 간첩행위의 특성을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안보·경제 관련 기밀이 해외로 유출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를 예방하고 적발 시 처벌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인 간첩죄를 손질해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반복돼 온 이유다.
◆국회 발의 간첩죄, 번번이 자동 폐기
14일 정치권에 따르면, 현행 형법상 간첩죄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데는 이미 여야 모두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정치 현안들이나 여야 정쟁으로 인한 관심 저조로 입법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지 못한 채 매번 법 개정안이 자동 폐기됐다. 2017년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이은재 의원은 외국 또는 외국인 단체를 위해 간첩행위를 하거나, 군사상 기밀을 외국 또는 외국인 단체에 누설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 징역에 처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도 2016년 같은 취지 법률안을 발의한 바 있다. 홍 의원은 “미국을 비롯해 독일, 프랑스 등 대부분 국가는 자국에 해가 되거나 타국을 이롭게 하는 행위에 대해 간첩죄를 적용해 중형에 처하고 있다”며 “적국이 아닌 동맹국이나 우방국에 기밀을 유출한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 새누리당(현 〃) 이철우 의원(현 경북도지사), 2014년 새누리당 이만우 의원, 2011년 민주당 송민순 의원, 2004년 민주당 최재천 의원이 각각 같은 취지 법안을 발의했다. 전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다.
최 전 의원은 세계일보에 “국가보안법 폐지 시 간첩죄의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간첩죄의 구성요건을 확장하는 내용이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최 의원의 법안은 국보법 폐지를 전제로 한 것이어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 지사 측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테러단체가 기승을 부리면서 간첩죄를 폭넓게 적용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었다”고 당시 법안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테러단체는 적국도, 외국도 아닌 만큼 ‘외국인 단체’를 간첩죄 구성요건에 넣어야 한다는 취지다. 이 지사 측은 “‘간첩’이란 단어가 우리나라에서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되다 보니 여야 간 논의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고 부연했다.
형법개정연구회도 2009년 외국을 위한 간첩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지만 국회는 응답하지 않았다.
민주당 소속 김영주 국회부의장이 발의를 앞두고 있는 형법 개정안은 오는 16일부터 열리는 임시국회와 내달 정기국회에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과거와 마찬가지로 다른 산적한 현안들에 밀려 여야의 협상 테이블에 오를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민주당이 일명 ‘간첩 방지법’의 입법을 당론으로 채택할지 여부도 관심사다.
◆간첩 붙잡아도 간첩죄 적용 못 했다
법망 미비 탓에 간첩을 적발해도 적국을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간첩죄를 적용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2015년 7월 유명상 당시 국방부 검찰단장의 국회 국방위원회 보고에 따르면, 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소속 A 소령은 중국 측에 군사기밀 27건을 유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 결과 A 소령은 2013년 6월, 2014년 10월, 2015년 2월 세 차례에 걸쳐 각종 기밀을 SD 메모리카드에 담아 중국 측 인사에 넘긴 것으로 파악됐다.
군검찰은 그러나 A 소령에게 형법상 간첩죄 대신 군사기밀보호법, 군형법상 군기누설죄를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 유 단장은 “국방부 검찰단은 A 소령에게 간첩죄를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면밀한 법적 검토를 했으나, 현행법상 간첩죄가 성립하려면 그 행위 대상이 적으로 한정되므로 적용하지 못했다”고 했다.
1993년 6월엔 일본 후지TV 서울지국장 시노하라 마사토가 우리 군 장교로부터 2급 군사기밀 자료들을 넘겨받아 주한 일본대사관 무관에게 전달하는 일이 벌어졌다. 시노하라는 망원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로 우리 군과 미군 시설, 훈련 상황 등을 촬영한 뒤 슬라이드 170여장을 만들어 본국 대사관에 제공하는 정보활동을 벌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때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만 적용됐다. 시노하라는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추방당했다.
◆해외선 외국 위한 간첩행위도 ‘엄벌’
우리와 달리 미국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기밀 유출 행위를 매우 엄격하게 처벌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미 중앙정보국(CIA) 전직 요원인 홍콩계 미국인 알렉산더 육칭 마는 2020년 8월 CIA 직원 명단과 기밀을 10년 이상 중국 측에 넘긴 것으로 드러나 간첩 혐의로 기소됐다.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이던 로버트 필립 한센은 2009년 9월 소련을 위해 간첩행위를 한 사실이 적발돼 간첩 혐의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미 해군정보국 정보분석가였던 조너선 폴라드는 1987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소속 정보원에게 아랍 국가 및 소련 관련 기밀을 넘겨준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 같은 엄격한 처벌은 국익을 해치는 간첩행위를 ‘엄벌주의’에 입각해 처벌하는 법률 규정을 마련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미국은 연방법률 18편 37장 ‘간첩 및 검열의 장’에서 미국을 위해하고 외국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국방기밀을 누설할 경우 최대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방시설 촬영 묘사, 암호 등 기밀정보 유출에 대한 처벌 규정도 개별적으로 두고 있다.
독일은 형법 94조상 외환죄로 간첩행위를 처벌한다. 독일에 불이익을 가져오거나 다른 국가에 이익을 제공하고자 국가기밀을 유출한 경우 1년 이상 자유형에 처한다. 국방기밀을 유지할 특별한 의무를 지는 자가 간첩행위를 했을 경우 무기 또는 5년 이상 자유형으로 가중 처벌한다. 중국은 형법 110조 간첩죄 및 111조 ‘타국을 위한 국가기밀 및 정보절취 정탐 매수 불법 제공죄’를 두고 있다. 간첩 행위자를 10년 이상 유기징역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적국은 물론 외국을 위한 간첩행위를 예외 없이 처벌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다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형법상 간첩죄 개정 시 군형법, 군사기밀보호법, 산업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과의 관계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