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들은) 무척 힘겨웠을 겁니다.” (용역업체 직원)
매캐한 썩은 내에 두 다리의 힘이 갑자기 풀렸다. 가까스로 낡은 적벽돌 연립주택의 1층에 들어서자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집주인의 연락을 받은 용역업체 직원들이 거실과 방에서 부지런히 포대에 살림살이를 담고 있었다.
시커먼 때가 낀 초인종 위에선 도시가스 검침원이 남기고 간 노란색 쪽지가 붙어있었다. ‘연락을 달라’고 적힌 메모의 날짜는 지난 10일. 열흘 남짓에 불과했다. 40㎡(12평) 안팎 자택의 좁은 현관 너머로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식탁이 눈에 띄었다. 거실을 겸한 부엌의 싱크대 위에는 주인 잃은 은색 주전자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식사를 한 흔적은 없었다. 안방과 거실 곳곳에는 비닐봉지와 살림살이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상태였다. 용역업체 직원은 “경찰이 조사를 위해 집 안을 뒤진 것 같다”고 전했다.
◆ 자택 곳곳에 세 모녀의 ‘고통’…생명 구할 ‘골든타임’ 있어
23일 오후 경기 수원시 권선구 권선로의 한 연립주택. 이곳에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세 모녀의 흔적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병마와 생활고에 시달리던 60대 어머니와 40대 두 딸은 이 연립주택 안에서 스스로 세상과 연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집에서 악취가 심하게 난다”는 건물 관계자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과 소방대에 의해 지난 21일 오후 2시50분쯤 발견됐다.
A4용지 9장 분량의 유서에는 “건강 문제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힘들다”는 내용이 띄엄띄엄 쓰여 있었다. 경찰은 집 안에서 발견된 시신이 심하게 부패해 부검을 거친 뒤에야 세 모녀의 신원을 특정할 수 있었다.
세 모녀는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 난소암을 앓던 어머니는 희귀 난치병을 앓던 두 딸과 함께 지내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20년 전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았다. 택배 등으로 생계를 꾸리던 장남이 2019년 숨지고 남편까지 사망하면서 더 어려운 처지가 됐다. 도움을 줄 친척도 없었다.
2020년 2월 이곳으로 이사 왔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입신고를 하지 않고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왔다. 2004년부터 주민등록을 둔 화성시 기배동 지인의 집에는 빚 독촉과 관련된 고지서만 쌓인 것으로 전해졌다. 주민 A씨는 “(숨진 세 모녀를) 동네에서 마주친 사람이 거의 없다”며 “아마 빚 독촉 때문에 주소를 숨기고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목숨을 구할 ‘골든타임’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민등록을 둔 화성시 기배동 행정복지센터는 지난 3일 주소지를 방문해 한 차례 현장조사를 벌였다. 지난 7월 관계기관으로부터 세 모녀에 대한 20여만원의 건강보험료 장기체납 명단을 건네받은 것이다. 세 모녀는 16개월째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자 동 주민센터는 이들을 복지서비스 ‘비대상’으로 전환했다. 유관기관 통보 등의 후속 절차는 없었다. 화성시 관계자는 “거소가 확인되지 않거나 연락이 두절되면 복지 시스템으로 지원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다른 지자체 관계자도 “소재가 확인되지 않는 건보료 체납자를 대상으로 어떻게 후속조치를 취하라는 내용의 매뉴얼이 없어 후속 대응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 모녀가 만약 지자체에 자신들의 어려움을 알렸다면 상황에 따라 월 120여만원의 긴급생계지원비나 긴급의료비 지원 혜택, 주거 지원 등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 김동연 지사, SNS 글 내려…전문가 “법령 개정보다 인식전환 프로그램 절실”
관련 지자체들은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이날 오전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에 글을 올려 “견딜 수 없는 비통함을 느꼈다”며 “벼랑 끝에 선 도민들이 도지사에게 직접 연락할 수 있는 핫라인이 실질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고 말했다. 경기도는 이번 사건과 관련 조만간 종합대책을 내놓을 방침이다. 김 지사도 이날 오후 페이스북 등에 올린 관련 글을 모두 삭제한 뒤 장고에 들어갔다. 자신의 관할에서 일어난 세 모녀 사망 사건이 엄중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정명근 화성시장도 “(공무원들이) 자칫 게을러 이런 일이 발생한 건 아닌지 근본적 대책을 찾고 있다”며 “(실거주지가 다를 경우) 행정기관이 추적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재준 수원시장은 주민자치회와 사회복지협의회 등을 활용한 마을돌봄공동체 부활을 언급했다. 이 시장은 “예전처럼 반상회라도 있었다면 통장이 세 모녀의 상황을 (앞서)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 수원시는 “중앙정부, 경기도와 연계해 복지 사각지대를 찾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겠다”며 “다시는 이처럼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은 8년여전 일어난 송파구 세 모녀 사건과 판박이다.
당시 송파구 석촌동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 모녀는 큰딸의 만성 질환과 어머니의 실직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갖고 있던 전 재산인 현금 70만원을 집세와 공과금으로 놔두고 삶을 등졌다.
복지사각지대를 여실히 드러낸 당시 사건의 파장으로 이른바 3건의 ‘세 모녀법’(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으나 사회 안전망 확충은 여전히 더딘 걸음을 걷고 있다.
이번 수원 세 모녀 사건도 개정 법률안의 허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법령에선 국가와 지자체가 수급권자 발굴을 위해 사회복지법인, 국민연금공단, 보건소 또는 경찰 등의 기관 및 단체와 연계·협력해 정보 공유 등이 이뤄지도록 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또 누구든지 사회적 위험에 처한 대상자를 발견했을 때는 보장기관에 신고하도록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정익중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이번 사건과 같이 등록된 주소지와 실거주지가 다른 경우에는 복지 사각지대 발굴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법령이 아닌 공무원 매뉴얼로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무엇보다 사각지대 발굴을 위한 시민의 인식 전환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제도나 법령으로 보완하더라도 늘 사각지대가 드러나는 만큼 주변 취약계층을 찾아내 돕기 위한 사회운동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최근 아동폭력 추방을 위해 벌이는 자발적 신고 캠페인이 벤치마킹 대상이다.
한편, 정부는 이번 수원 세 모녀 사건과 관련해 복지정보시스템 등의 개선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