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할아버지가 고생해서 번 돈을 은행에 맡긴 뒤로 3대째 찾지 못하고 있는 한 가족의 사연이 전해졌다.
이 가족은 현재 가치로 100억원으로 추정되는 현금보관증을 소유하고 있지만,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70여년이 지나도록 지급을 받지 못하고 있어 정부 당국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3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경북 예천군의 김규정(79) 씨는 부친이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에 남긴 거액의 돈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인출하지 못하고 있다.
김씨의 부친 고(故) 김주식 씨는 일제강점기이던 1910년에 14살의 어린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 등을 하며 35년간 한푼 두폰 돈을 모았다. 이후 1945년 해방이 되자 고생하며 모은 엔화를 가지고 귀국했다.
김주식 씨는 이듬해인 1946년 조흥은행 예천군 지점을 찾아 1만2220엔을 맡긴 후 ‘현금보관증’을 발급받았다.
현금보관증에는 ‘1946년 3월5일 조흥은행 풍천지점의 박종선 지점장이 예천군 보문면 미호동에 사는 김주식 씨의 일본 돈 1만2220엔을 받아 보관함을 증명한다’라고 적혀 있다. 또 그의 사인과 조흥은행 직인이 찍혀 있으며, ‘다른 사람이 소유권을 침해할 수 없다’고 명시해두었다.
김주식 씨가 맡긴 돈의 가치는 정확히 산정하기 어렵지만 당시 환율과 물가 상승, 화폐개혁 등을 고려할 때 현재 가치로 40억~70억원으로 평가되며 76년간의 은행 이자까지 합하면 100억원을 훌쩍 넘길 것으로 추산된다. 가치 산정의 기준이 되는 쌀값의 경우 경기미 1등품 한 가마(80kg)가 1946년 3.86원에서 올해 22만1520원으로 5만7389배 올랐다.
김주식 씨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현금보관증을 들고 조흥은행을 다시 방문했지만 맡겨둔 돈을 찾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터져 많은 자료가 유실됐고, 건국 초기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탓에 금융시스템도 미비했으며, 은행에서 차일피일 출금을 미뤘다고 한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는 경제개발을 위한 외화자금이 필요했던 때라 엔화의 출금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후에도 김주식 씨는 자신이 평생 타국에서 고생하며 번 돈을 찾기 위해 정부 기관들을 수소문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69년 화병으로 눈을 감았다.
김주식 씨의 현금보관증은 오랜 기간 창고에 보관돼 오다 1982년 그의 손녀에 의해 발견됐다.
김주식 씨의 부인은 현금보관증에 얽힌 얘기들을 그의 아들인 김씨에게 해줬고, 그때부터 그는 다시 돈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하고 있다.
김씨는 1980년대 초 방문한 조흥은행에서 한 국고 담당 대리관에게 “우리 은행에서 맡은 것이 맞다. 상당한 돈이다. 100억원 이상을 내줘야 한다”라며 “하지만 돈을 내주려면 재무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당시는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로 김씨의 거액을 인출하려면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 당국에 문의한 지 20일 뒤 “현금보관증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전과는 다른 답신을 받았다. 이에 김씨는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보내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현재는 80살이 가까운 고령이 된 김씨를 대신해 그의 막내딸 A씨가 현금보관증을 들고 돈을 찾기 위해 나서고 있다. A씨는 최근 금융감독원과 2006년 조흥은행과 합병한 신한은행 등에 민원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재는 금융시스템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바뀌었지만, 과거 자료들이 대부분 사라진 탓에 현금보관증이 진본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