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힌남노’가 할퀴고 간 경북 포항 지역 침수 피해는 빗물펌프장 용량 부족, 지하주차장 침수 방지 시설 미비라는 인재에 역대급 강수와 지형, 만조 등 천재가 얽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전문가들은 최근 이상기후에 따른 폭우가 이어지는 만큼 수방 시설 강화 외에도 확실한 대피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7일 포항시 등에 따르면 전날 힌남노의 영향으로 포항 지역에는 시간당 110㎜가 넘는 비가 내렸다. 빗물을 수용할 빗물펌프장은 총 15개가 있는데, 가장 큰 용량을 가진 ‘형산 빗물펌프장’이 시간당 16만7400t(71㎜)의 빗물을 처리할 수 있다. 포항에 내린 폭우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침수 피해가 컸던 대송면 제내리의 빗물을 처리하는 ‘대송 빗물펌프장’의 시간당 처리용량은 51.7㎜에 불과했다.
포항시는 지역 15개 빗물펌프장을 모두 가동하고 있었지만, 기록적인 폭우에 속수무책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천보다 낮은 지대와 만조로 바닷물까지 들어차면서 배수가 원활하지 못했다. 포항시 관계자는 “빗물이 펌프장 근처까지 차오르고, 일부 펌프장은 전기실 바닥까지 물이 찼지만 끝까지 사수하며 운영했다”며 “제내리 빗물을 처리하는 대송 펌프장은 칠성천으로 배수하는데, 이미 하천이 범람해 펌프장 가동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기후변화로 인해 집중호우가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배수펌프 용량 기준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하성 우석대 교수(소방방재학)는 “보통 평균 강우량을 기준으로 배수 시설을 설계하는데 포항의 경우 배수펌프 용량이 부족해 침수 피해가 컸다”며 “최대 강우량 이상을 기준으로 설정해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지하주차장은 침수를 막기 위한 건물 설계 기준이 모호하게 설정된 점이 비슷한 사고가 이어지는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행정안전부의 ‘지하 공간 침수 방지를 위한 수방 기준’에 따르면 지하 공간의 침수를 막기 위해 방수판 또는 모래주머니, 역류방지 밸브, 배수펌프 등을 설치하도록 돼 있지만, 이는 행안부 장관이 침수 피해가 우려된다고 인정한 지역으로 한정하고 있다.
심지어 2년 전에는 건축법 개정을 통해 아파트 등 건축물의 재난 대비를 평가하는 건축심의 과정을 대폭 줄였다. 그동안 아파트 건축심의를 받을 때 전문가로 구성된 지방건축위원회가 지진, 풍수해 등 재난, 교통, 소방 등에 대해 심층적인 검토를 하도록 했다. 하지만 2020년 4월 해당 조항이 삭제됐다.
이용재 경민대 교수(소방방재학)는 “이제는 공무원들이 안전 요소를 판단해야 하는데 안전 검토가 제대로 되지 않을 우려가 크다”며 “아파트를 빨리 공급하기 위해 종합적인 안전 검토 기회조차 없애버렸다”고 지적했다.
집중호우 상황에서 지하주차장 같은 도심 지하 시설은 가장 피해야 할 침수위험지대로 꼽히지만 제대로 된 대피 매뉴얼이 없었던 것도 피해를 키운 근본 원인 중 하나였다. 이번 포항 주차장은 주민들이 차를 빼러 간 사이 빗물이 아래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낙차에 따른 유속 증가로 10분이 채 되지 않아 물에 잠겼다. 지난달 수도권 집중호우 상황에서도 서울 서초구의 한 지하주차장에서 40대 남성이 차를 꺼내다 급류에 휩쓸려 숨지는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교수(소방방재학)는 “태풍이 오기 전부터 누차 위험성을 방송했는데 지하에 차를 주차한다는 것은 안전불감증 사고로도 볼 수 있다”며 “올바른 대피 매뉴얼 숙지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편 포항시는 이날 대규모 장비와 인력을 동원해 복구 작업을 이어갔다. 남구와 해안가 마을 등 지역별로 살수차, 포클레인 등과 인력 1만5000여명이 투입됐다. 이들은 유실된 제방을 복구하고 침수 지역의 물을 빼내는 데 주력했다. 도심 곳곳의 쓰레기를 치우는 작업은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 부산과 경남 일대에는 공무원과 군부대가 투입돼 현장 복구 작업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