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힌남노’로 10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한 포항 참사를 두고 부실한 수해 대책이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하주차장 침수를 막을 설계 기준이 모호한데다 최근 시간당 100㎜ 이상 기습 폭우가 거듭됐지만 빗물펌프 등 방재 시설 용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7일 포항 이재민들은 “천재지변이 아닌 인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방재 전문가들에 따르면 현재 지하에 침수방지 시설을 설치할 의무 규정은 미비한 실정이다. 행정안전부 ‘지하 공간 침수 방지를 위한 수방 기준’이 있으나 적용 지역과 설비 기준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 이 규칙은 침수·해일 위험지구, 5년 이내 침수됐던 지구 등에 한해 지하 공간에 수방 기준을 적용하도록 했다. 출입구는 ‘예상 침수높이’보다 높게 하도록 해 기준이 자의적이고, 배수펌프 용량 규정은 없다.
게다가 2년 전 건축법 개정으로 건축심의 과정에서 재난 대비 평가는 오히려 대폭 줄었다. 집중호우 때 지하주차장에서 위기를 피하는 대응 요령도 충분히 홍보되지 못했다.
지난 6일 울산 울주군 하천에 빠져 실종됐던 20대 남성은 이날 24㎞ 떨어진 곳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이 남성을 포함해 힌남노로 11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됐으며 3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지하주차장 피해자 8명을 포함해 포항에서만 9명이 사망했다. 포항시 장기면 두원리에서 논을 점검하기 위해 나갔다 실종된 80대 남성은 여전히 발견되지 못한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경북·포항·경주 현장 방문을 마친 뒤 포항과 경주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은 두 지역의 막대한 피해 규모·주민 불편의 심각성과 함께 중대본의 사전 피해 조사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특별재난지역 우선 선포가 필요하다며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특별재난지역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에 대해서도 피해 조사 등을 거쳐 요건이 충족되는 대로 신속하게 추가 선포할 계획”이라고 했다.
◆폭우 감당못한 펌프장… 지하시설 대피 매뉴얼 없어 ‘속수무책’
태풍 ‘힌남노’가 할퀴고 간 경북 포항 지역 침수 피해는 빗물펌프장 용량 부족, 지하주차장 침수 방지 시설 미비라는 인재에 역대급 강수와 지형, 만조 등 천재가 얽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전문가들은 최근 이상기후에 따른 폭우가 이어지는 만큼 수방 시설 강화 외에도 확실한 대피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7일 포항시 등에 따르면 전날 힌남노의 영향으로 포항 지역에는 시간당 110㎜가 넘는 비가 내렸다. 빗물을 수용할 빗물펌프장은 총 15개가 있는데, 가장 큰 용량을 가진 ‘형산 빗물펌프장’이 시간당 16만7400t(71㎜)의 빗물을 처리할 수 있다. 포항에 내린 폭우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침수 피해가 컸던 대송면 제내리의 빗물을 처리하는 ‘대송 빗물펌프장’의 시간당 처리용량은 51.7㎜에 불과했다.
포항시는 지역 15개 빗물펌프장을 모두 가동하고 있었지만, 기록적인 폭우에 속수무책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천보다 낮은 지대와 만조로 바닷물까지 들어차면서 배수가 원활하지 못했다. 포항시 관계자는 “빗물이 펌프장 근처까지 차오르고, 일부 펌프장은 전기실 바닥까지 물이 찼지만 끝까지 사수하며 운영했다”며 “제내리 빗물을 처리하는 대송 펌프장은 칠성천으로 배수하는데, 이미 하천이 범람해 펌프장 가동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기후변화로 인해 집중호우가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배수펌프 용량 기준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하성 우석대 교수(소방방재학)는 “보통 평균 강우량을 기준으로 배수 시설을 설계하는데 포항의 경우 배수펌프 용량이 부족해 침수 피해가 컸다”며 “최대 강우량 이상을 기준으로 설정해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지하주차장은 침수를 막기 위한 건물 설계 기준이 모호하게 설정된 점이 비슷한 사고가 이어지는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행정안전부의 ‘지하 공간 침수 방지를 위한 수방 기준’에 따르면 지하 공간의 침수를 막기 위해 방수판 또는 모래주머니, 역류방지 밸브, 배수펌프 등을 설치하도록 돼 있지만, 이는 행안부 장관이 침수 피해가 우려된다고 인정한 지역으로 한정하고 있다.
심지어 2년 전에는 건축법 개정을 통해 아파트 등 건축물의 재난 대비를 평가하는 건축심의 과정을 대폭 줄였다. 그동안 아파트 건축심의를 받을 때 전문가로 구성된 지방건축위원회가 지진, 풍수해 등 재난, 교통, 소방 등에 대해 심층적인 검토를 하도록 했다. 하지만 2020년 4월 해당 조항이 삭제됐다.
이용재 경민대 교수(소방방재학)는 “이제는 공무원들이 안전 요소를 판단해야 하는데 안전 검토가 제대로 되지 않을 우려가 크다”며 “아파트를 빨리 공급하기 위해 종합적인 안전 검토 기회조차 없애버렸다”고 지적했다.
집중호우 상황에서 지하주차장 같은 도심 지하 시설은 가장 피해야 할 침수위험지대로 꼽히지만 제대로 된 대피 매뉴얼이 없었던 것도 피해를 키운 근본 원인 중 하나였다. 이번 포항 주차장은 주민들이 차를 빼러 간 사이 빗물이 아래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낙차에 따른 유속 증가로 10분이 채 되지 않아 물에 잠겼다. 지난달 수도권 집중호우 상황에서도 서울 서초구의 한 지하주차장에서 40대 남성이 차를 꺼내다 급류에 휩쓸려 숨지는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교수(소방방재학)는 “태풍이 오기 전부터 누차 위험성을 방송했는데 지하에 차를 주차한다는 것은 안전불감증 사고로도 볼 수 있다”며 “올바른 대피 매뉴얼 숙지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편 포항시는 이날 대규모 장비와 인력을 동원해 복구 작업을 이어갔다. 남구와 해안가 마을 등 지역별로 살수차, 포클레인 등과 인력 1만5000여명이 투입됐다. 이들은 유실된 제방을 복구하고 침수 지역의 물을 빼내는 데 주력했다. 도심 곳곳의 쓰레기를 치우는 작업은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 부산과 경남 일대에는 공무원과 군부대가 투입돼 현장 복구 작업을 이어갔다.
◆복구비 50~80% 국비 지원… 침수가구엔 200만원
태풍 ‘힌남노’로 큰 피해를 본 경북 포항·경주가 7일 특별재난지역으로 우선 선포되면서 국가 차원의 다양한 지원이 이뤄지게 됐다.
이날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특별재난지역이 되면 사유시설·공공시설 피해 복구비의 50∼80%가 국비로 지원된다. 지방자치단체는 재정 부담을 크게 덜 수 있다.
피해 주민에겐 재난지원금이 제공된다. 사망·실종 2000만원, 부상은 장해등급에 따라 500만∼1000만원이 지원된다. 주택이 전파된 경우 1600만원, 반파는 800만원, 침수는 2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국세·지방세 납부 예외, 공공요금 감면 등 간접 혜택도 있다. 일반 재난지역에서 실시하는 18가지 혜택 외에도 건강·고용 보험료 감면, 전기·도시가스 요금 1개월분 감면 등 12가지 혜택이 추가로 제공된다.
이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추석에 고향을 찾는 가족들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피해가 확인된 침수주택 등은 복구계획이 확정되기 전이라도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정부는 이날 국무회의를 열고 경주·포항 지역 등을 신속히 복구하기 위해 목적예비비 500억원 지출안을 심의·의결했다. 이번 예비비는 국가재정법에 따라 긴급구호, 구조 및 복구에 드는 재원을 개략적으로 산정해 긴급히 지원할 수 있는 개산예비비 제도를 활용해 동원했다. 개산예비비 지출은 2012년 태풍 ‘산바’ 때 활용된 이후 10년 만에 처음이다.
행안부도 힌남노 피해 지자체에 특별교부세 80억원을 긴급 지원했다. 경북 40억원, 부산·울산 각 10억원, 대구·전남·경남·제주에 각 5억원을 지원했다.
금융권의 지원도 이어졌다. 신한은행은 태풍 피해 중소기업과 협력기업, 개인을 대상으로 2000억원의 긴급 금융지원을 시행한다. 하나은행은 개인에게 5000만원 이내의 긴급생활안정자금 대출, 중소기업에 5억원 이내 긴급경영안정자금대출 등 총 2000억원 한도의 신규 자금을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