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국과 한국, 일본 등 김정은 체제에 적대적인 국가를 향해 선제적으로 핵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새 ‘핵 독트린(교리)’을 법제화했다. 유사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지휘부가 공격을 받을 경우 자동으로 핵 타격을 가한다는 조항도 명시했다. 김 위원장은 “미국이 노리는 목적은 우리 정권을 어느 때든 붕괴시켜버리자는 것”이라며 “나라의 생존권과 국가와 인민의 미래의 안전이 달린 자위권을 포기할 우리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지난 8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에서 의결한 핵 교리 법제화와 “절대로 먼저 핵포기란, 비핵화란 없으며 그를 위한 어떤 협상도, 그 공정에서 서로 맞바꿀 흥정물도 없다”고 한 김 위원장의 시정연설은 북한이 7차 핵실험 강행 등 핵무기 고도화에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천명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북한이 윤석열정부가 제안한 북한 비핵화 로드맵 ‘담대한 구상’에 대한 거부 의사를 명확히 함과 동시에 미국을 향해 비핵화 협상이 아닌 핵보유국으로서 군축협상을 통해 정권 안정을 공고히 하려는 노림수라는 분석이다.
◆북 “작전상 필요 제기되면 핵 공격”
김 위원장은 8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노리는 목적은 우리의 핵 그 자체를 제거해버리자는데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핵을 내려놓게 하고 자위권행사력까지 포기 또는 렬세하게 만들어 우리 정권을 어느 때든 붕괴시켜버리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나라의 생존권과 국가와 인민의 미래의 안전이 달린 자위권을 포기할 우리가 아니며 그 어떤 극난한 환경에 처한다 해도 미국이 조성해놓은 조선반도의 정치군사적 형세하에서, 더욱이 핵적수국인 미국을 전망적으로 견제해야 할 우리로서는 절대로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핵무력 정책’ 의도와 전망은
북한이 법제화한 ‘핵무력 정책’은 북한이 핵무기를 자위적 차원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안보에 위협이 될 경우 공세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북한은 국제사회의 핵포기 압박에 ‘비핵화는 없다’는 점을 더욱 분명히 하는 등 7차 핵실험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은 법령을 통해 핵무기 보유국임을 강조하며 책임있는 자세를 내세웠지만 ‘적대세력의 공격이 감행됐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유사시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라고 명시한 점은 사실상 북한이 스스로 위험하다고 판단하거나 필요에 따라 선제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정대진 한라대 교수는 “북한의 이번 법령 채택은 지난 핵개발 성과를 법제 차원에서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미래 핵사용 기준을 구체화해 대외적으로 ‘핵사용 문턱’을 낮추는 시도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이어 “전술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현 단계에서 이번 핵무기 사용조건은 북한 핵무기의 실제적 목표가 주한미군과 남한 지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김 위원장이 직접 ‘우리 핵무력의 전투적 신뢰성과 작전운용의 효과성을 높일 수 있게 전술핵 운용공간을 부단히 확장하고 적용수단의 다양화를 더 높은 단계에서 실현하여 핵전투태세를 백방으로 강화해나가야 한다’고 촉구한 점으로 미뤄볼 때 북한은 당분간 협상 대신 7차 핵실험 등을 통해 핵무기 역량을 키우는 데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7차 핵실험 시점과 관련해 “북한은 핵개발을 지속할 것으로 보이며 조만간 7차 핵실험을 진행할 것으로 판단된다”며 “10월 중국 당대회 이후 7차 핵실험 단행을 통해 연설내용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려 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전망했다.
◆국제사회의 우려…한·미 당국의 대응은
한국 정부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북한의 비핵화를 추진해 나간다는 총체적인 접근을 흔들림 없이 취해 나갈 것”이라며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해 북한이 핵 사용 위협을 중단하고 우리 측이 제안한 담대한 구상에 조속히 호응해 줄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카린 장피에르 미국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은 동맹과 파트너와 긴밀히 협력해 북한 위협에 대응하는 데 계속 집중하고 있다”며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우리의 공통 목표를 진전하겠다는 정책도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북한의 7차 핵실험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한·미 당국의 공조가 이어질 전망이다. 외교부와 국방부는 오는 16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4년8개월 만에 제3차 한·미 외교·국방(2+2)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 회의를 가질 전망이다. 이번 EDSCG에서는 북한이 핵실험 등 전략적 도발을 감행할 경우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적시 전개 등 구체적인 확장 억제 강화 방안이 논의될 전망이다.
미국 핵추진 항공모함인 ‘로널드 레이건호(CVN-76)’가 이달 말 부산항에 입항해 한국 해군과 연합훈련을 할 예정이다. 미 항모가 한국에 입항하는 것은 북한의 6차 핵실험이 있었던 2017년 3월 이후 약 5년 만이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강경 움직임에 우려를 나타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9일(현지시간) “깊이 우려한다”고 논평했다. 스테판 뒤자리크 대변인은 “안보 독트린에서 핵무기의 역할과 중요성을 늘린다는 것은 핵 위험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국제사회의 수십년 노력에 반대되는 일”이라고 전했다.
마오닝(毛寧)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입장은 변화 없다”며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 국면에서 출발해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추진하기 위해 계속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