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빈곤’ 공론화 필요성 대두
스코틀랜드에서는 지난달 15일(현지시간) 지방자치단체와 학교 등 공공기관이 생리대·탐폰 등을 비치해 놓고 필요한 모든 여성에게 무상 제공하도록 의무화한 생리용품법 시행에 들어갔다. 연간 예상 소요금액은 870만파운드(약 137억원)인데 스코틀랜드의 가임기 여성은 120만명 정도다. 영국 시민단체들은 중앙 정부에 스코틀랜드와 같은 무상 생리대 정책의 전면적 시행을 요구하고 나섰다.
세계은행은 전 세계적으로 최소 5억명의 여성과 소녀가 생리용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월경권 보장 운동을 하는 국제기구 존엄한 월경(Dignity Period) 측은 “월경을 언급하는 것은 여전히 여러 나라에서 금기시되고 있다. 생리용품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문제도 은폐되고 있다”고 했다.
◆세계 곳곳서 월경권 보장 움직임
월경권 보장을 위해서는 생리용품 의무 비치부터 생리대 세금 폐지, 생리 문제를 자유롭게 말하는 문화의 정착까지 폭넓은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가장 먼저 무상 생리대를 실현한 스코틀랜드의 법은 ‘생리용품을 받는 것이 복잡하거나 너무 관료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생리용품이 필요한 이유와 필요한 양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도 있다. 월경권을 보장하려면 선별 지급이 아닌 보편 지급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의 취지다.
발의자인 노동당 모니카 레논 의원은 “(스코틀랜드가) 생리용품 무상 제공을 법제화한 첫 사례이지만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를 인지한 여러 나라에서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영국 북아일랜드가 비슷한 조치를 검토 중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델라웨어, 일리노이 등 12개 주에선 모든 여성 화장실에 무료 생리용품을 비치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했다. 영국은 2020년부터 모든 초·중학교에 생리용품을 비치했고, 지난해 1월 생리용품 부가가치세(5%)를 폐지했다. 독일도 지난해 생리용품을 사치품이 아닌 생활필수품으로 분류해 세율을 19%에서 7%로 대폭 낮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생리대 가격이 가장 비싼 한국은 2016년 깔창생리대 사건 이후 취약계층 청소년의 건강권 보장 차원에서 지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직은 선별 지급이라 지원받는 학생에 대한 낙인효과, 학교 밖 청소년은 지원의 사각(死角)지대에 있다는 점이 한계다. 한국은 생리대를 생활필수품으로 규정해 2004년부터 부가가치세(10%)를 면제하고 있어도 생리대 가격 자체가 높아 큰 의미가 없다. 여성가족부가 물가 상승률을 반영해 해마다 3∼4%의 지원금을 올리고 있지만 생리대 가격 인상 폭이 훨씬 크다는 지적이다.
◆월경정책 책임자 남성 뽑았다가 역풍
월경권 확대 과정에서 잡음도 있다. 스코틀랜드 테이사이드에서 첫 번째 생리존엄담당관(Period Dignity Officer)으로 남성을 임명해 여성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여성 지원자들을 놔두고 생리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남성이 생리관련 업무 총괄을 맡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었다.
미국 테니스 스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는 “여성들이 면도하는 법이나 전립선 관리하는 법 등을 남성에게 설명하려 한 적이 있었느냐”며 “(남성에게 월경정책을 맡기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난했다. 여성인권 활동가 수전 달게티도 “(남성이) 다른 사람 앞에서 드레스가 피투성이가 되는 공포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생리가 시작되지 않아 터질 것 같은 불안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당국은 “성별, 나이, 배경을 불문하고 가장 적합한 사람을 뽑았으며 생리에 대한 편견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버티다가 한 달 만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담당관 임명 철회는 물론 아예 자리까지 없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런 결과에 대해 남성이 월경정책을 감독하고 맨스플레이닝(Mansplaining: 남성 중심적 사고로 여성을 가르치려고 하는 행태)하는 것에 대한 여성의 분노가 치솟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4년간 스코틀랜드에서 월경권 관련 캠페인을 주도한 레논 의원은 “월경 관련 논쟁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밀려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 일로 어렵게 성사된 스코틀랜드의 선구적인 정책이 퇴색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