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3연속 ‘자이언트 스텝’(한번에 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단행하면서 미국 기준금리가 한국보다 0.75%포인트 높아졌다. 한국은행은 올해 들어 사상 초유의 ‘빅스텝’(〃 0.50%포인트 인상)을 포함해 네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높여왔지만, 미국이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더 큰 폭으로 금리를 올리면서 또다시 한·미 금리의 역전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외국인 자금 유출과 원화 가치 하락, 물가 상승 등을 유발하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기준금리 인상 압박을 받는 한은이 다음 달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통화정책방향회의에서 재차 빅스텝을 밟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한·미 금리차 크게 벌어지며 한은 빅스텝 가능성↑
예상보다 미국의 통화 긴축 속도가 빨라지면서 한은은 올해 남은 10월, 11월 금통위에서 ‘베이비 스텝’(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워졌다. 현재 한국 기준금리는 2.50%로, 상단 기준 미국 기준금리(3.00∼3.25%)보다 0.75%포인트 낮다. 지난 7월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두 번째 자이언트 스텝을 밟은 뒤 미국의 기준금리(2.25∼2.50%)는 약 2년 반 만에 한국(2.25%)보다 높아졌다가 지난달 25일 한은이 0.25%포인트를 올려 같아졌지만, 다시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만약 다음 달 12일 한은 금통위가 베이비 스텝을 밟고, 11월 연준이 다시 자이언트 스텝에 나서면 한·미 금리차는 1.25%포인트까지 커진다. 이어 11월 말 금통위가 또 0.25%포인트만 올리고, 연준이 12월 0.50∼0.75%포인트 인상을 이어가면 한·미 금리차는 최대 1.75%포인트까지 벌어질 수 있다.
◆미국 금리 인상 기조 속 자본 유출·환율·물가 압력 커져
미국 금리가 한국 금리보다 높아지는 역전 현상이 벌어질 경우 외국인 자본 유출과 원화 약세 등의 우려가 나온다.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가 아닌 원화 입장에서 기준금리가 미국보다 크게 낮아지면,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가고 원화 가치가 떨어질 위험이 커진다. 특히 지금처럼 원·달러 환율이 크게 오르면 수입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소비자물가를 더욱 끌어올리게 된다. 고환율 역시 기준금리 인상의 주요 변수 중 하나라는 의미다. 이 총재도 이날 “한은 입장에서는 물가가 가장 관건”이라면서 “원화가 절하되는 문제가 우리 물가에 어떤 영향을 주고 물가를 잡기 위해서 어떤 금리 정책을 해야 하는지가 한은의 가장 큰 의무”라고 말했다.
연말까지 미 연준의 가파른 기준금리 인상은 계속해서 이어질 전망이다. 주요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미 연준의 자이언트 스텝은 시장 예상에 부합했지만,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위원들의 금리 인상 전망을 보여주는 지표인 점도표의 향후 금리 전망이 매파적(통화 긴축 선호)이었다고 평가했다. 연준은 점도표에서 올해 말 금리 수준을 4.4%로, 내년 말 금리 수준을 4.6%로 조정했다. 지난 6월 점도표의 3.4%, 3.8%에서 대폭 상향한 것이다. 이에 따라 연준은 올해 남은 11월, 12월의 FOMC에서도 빅스텝과 자이언트 스텝으로 총 1.25%포인트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부 은행은 연준 최종 금리가 5.0%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이승헌 한은 부총재도 이날 ‘시장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당분간 높은 인플레이션 상황이 지속되면서 큰 폭의 정책금리 추가 인상이 이어질 수 있는 만큼 글로벌 금융시장이 계속 높은 변동성을 나타낼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달러 결제 항공·석유·배터리 ‘시계제로’
원·달러 환율이 13년6개월 만에 처음으로 1400원을 돌파하면서 국내 기업들에 비상이 걸렸다. 글로벌 공급망에 얽혀 있는 기업들 입장에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제로’ 상황이다. 수출 기업에는 고환율로 매출이 늘어나는 효과도 있지만, 원자재를 비싼 가격에 해외에서 들여와 국내에서 제품을 만드는 기업 입장에서는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2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기준금리 인상 발표 여파에 따라 2009년 3월31일 이후 처음으로 1400원을 넘어섰다. 이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서 이제 막 벗어난 항공사들은 고환율의 충격에 다시금 발목이 잡히는 모양새다. 유류비, 항공기 리스료뿐 아니라 대부분의 비용을 달러로 지급하는 항공사들은 환율이 높으면 지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무 구조도 취약해진다. 대한항공의 경우 환율 10원 변동 시 약 350억원의 외화평가손실이 발생한다. 환율이 1300원에서 1400원으로 오르면 장부상 35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아시아나항공도 환율이 10원 오르면 284억원의 외화환산손실이 발생한다. 이미 고환율 여파로 2분기 항공사의 외화환산손익은 손실로 전환됐다.
고환율로 인한 해외여행 심리 위축도 문제다. 높은 환율로 인해 해외여행 수요가 줄어들면 항공사들의 국제선 운항 확대에도 제동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달러 빚이 많은 국내 배터리·석유화학 업계의 부담도 가중되고 있다. 배터리와 석유화학 업계는 글로벌 수요 증가와 친환경 미래 사업 전환 등으로 대규모 해외 투자를 진행하고 있어 외화부채도 급증한 상태다.
철강재 생산에 필요한 철광석과 제철용 연료탄 등의 원재료를 수입하고 있는 철강업계도 환율 급등으로 인해 수익성에 빨간불이 켜졌다. 포스코를 비롯한 주요 철강 회사는 수출을 통해 환율 헤지(위험 회피)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지만, 고환율 기조가 장기화하면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아울러 최근 글로벌 경기 불황으로 철강 수요가 위축되면서 환율 인상에 따른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제대로 반영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원자재를 해외에서 사들여 와 국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업체 역시 고환율 여파에 경영난마저 우려하고 있다. 원자재 구매 비용은 오르지만, 상승분을 납품단가에 즉각 반영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이럴 경우 원자재 비용 부담을 중소기업이 그대로 떠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