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간) 영국·미국에 이어 캐나다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하며 5박7일 간의 외교 일정을 마쳤다. 유엔총회 참석을 계기로 미국 뉴욕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첫 양자 회동을 하고, 미국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11억5000만 달러(1조6307억원) 규모 투자를 이끌어낸 점 등은 성과로 꼽힌다. 하지만 한·일 정상 회동 과정에서 일본 측의 파워게임에 끌려다니는 등 외교적 미흡함을 드러낸 데다, 윤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하며 실점도 컸다는 평가가 나온다.
◆런던行, 엘리자베스 국장 참석…‘조문 취소’ 논란도
윤 대통령은 지난 19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장례식에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도착 당일인 18일에는 찰스 3세 국왕 주최로 열린 리셉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 등 주요 정상들에 이어 나루히토 일왕, 요르단 국왕 부부 등 세계 왕실 인사들을 만났다.
당초 윤 대통령은 도착 첫날 런던에 있는 한국전 참전기념비를 찾아 헌화하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시신이 안치된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참배, 조문록을 작성할 계획이었지만, 현지 교통 체증이 심해 다음 날 뒤늦게 엘리자베스 2세 조문록에 추모의 글을 남겼다.
하지만 전날까지 바이든 대통령 등 세계 주요 정상들이 조문을 한 상황에서 윤 대통령의 참배가 미뤄지면서 이를 둘러싸고 영국 왕실이 윤 대통령을 홀대했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윤 대통령이 주요 7개국(G7) 정상과 달리 조문 일정에 공식 초청받지 못해 영국 왕실과 정부 측으로부터 불충분한 의전을 받았다는 ‘지라시’도 유포됐다.
김은혜 홍보수석은 이런 논란에 대해 “영국의 여러 복잡한 상황 때문에 (현지시간으로) 오후 2∼3시 도착한 정상은 오늘 조문록을 작성하도록 안내가 됐다. 영국 왕실에선 공항 상황이 좋지 않아 (윤 대통령의) 리셉션 참석이 촉박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왕실 차원에서 총리가 사용했던 방탄용 차량을 제공했고 경호 인력도 추가 배치했다”며 ‘외교 홀대론’을 일축했다.
◆첫 한·일 정상회담, 진통 끝에 성사…尹 ‘비속어 논란’ 일파만파
윤 대통령은 지난 20일 유엔총회 첫날 10번째 연설자로 나서 자유를 기반으로 한 193개 유엔 회원국 간의 연대를 위기 극복 방안으로 제시했다. 유엔 내에서 한국의 역할을 확대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뉴욕 체류 기간에 한·미, 한·일 정상 간 별도의 환담도 나눴다.
특히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회동은 가장 주목을 받았다. 윤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부터 한·일 관계 회복을 주요 외교 과제로 내세웠다. 기시다 총리와의 이번 회동은 그 첫걸음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다만 만남이 성사되기까지 대통령실이 일본 측의 눈치를 살피며 끌려다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굴욕 외교’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회동 성사 과정에서도 신경전이 첨예했다. 대통령실이 지난주 한·일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언급하자, 기시다 총리는 곧장 불쾌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일본 언론을 통해 회담 성사를 둘러싼 부정적 전망이 쏟아지자, 대통령실은 회담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도 “드릴 말씀이 없다”며 말을 극도로 아꼈다. 이런 가운데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가 머문 행사장을 방문하는 형식으로 만남이 이뤄지고, 한국 취재진이 배제된 채 일본 취재진만 윤 대통령의 모습을 중계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대통령실이 너무 저자세로 임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한·일 정상은 28층에 유엔주재 일본대표부가 들어선 건물에서 만났다. 이날 회담에 대해서도 한국은 ‘약식회담’이라고 의미를 높인 데 반해, 일본은 ‘간담’이라고 규정하며 낮췄다.
양국은 정작 회동을 하고도 회동 형식과 합의 내용에 이견을 보였다. 대통령실은 양국이 관계 개선 필요성을 공감하고 외교 당국 간 대화를 가속화하겠다고 밝혔지만, 일본 측은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구축된 우호협력 관계에 기초한 미래지향적 발전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1965년 국교정상화’를 언급한 대목에서 일본 정부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더 이상 배상 책임이 없다는 기존 입장을 내보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은 불발됐다. 대신 윤 대통령은 지난 21일 바이든 대통령과 두 차례 짧은 환담을 나눴다. 하지만 처음은 행사장 무대 위에서 ‘48초 스탠딩’ 만남을 하고 그 다음에도 수많은 정상들이 모인 리셉션에서 잠깐 얼굴을 마주하며 미 행정부의 전기차법(정식 명칭 인플레이션 감축법) 발표에 따른 시급한 현안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또 그 과정에서 윤 대통령의 ‘막말 논란’이라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윤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이 주최한 ‘글로벌 펀드 재정공약 회의’를 퇴장하는 도중 박진 외교부 장관 쪽을 향해 “국회에서 이 ××(비속어)들이 승인 안 해주면 XXX이 쪽팔려서 어떻게 하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현장에 있던 취재진 카메라에 포착됐다.
김 홍보수석은 22일 현지 브리핑에서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의 취지를 설명하며 진화에 나섰다. 당초 ‘바이든이 쪽팔려서’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며 ‘외교 참사’라는 비판이 쏟아지자 김 수석은 “(대통령 발언에서) 미국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고 바이든이라는 말을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며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고 ‘날리면’이라고 돼 있다”고 정정했다.
윤 대통령이 해당 행사에서 정부 예산에 반영된 1억 달러 공여를 약속한 가운데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이를 통과시켜주지 않으면 자신의 체면이 깎일 것을 우려하는 발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윤 대통령이 야당을 향해 “이 XX들”이라고 한 점에서 여전히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1조원 이상 북미 기업 투자 유치
윤 대통령이 22일 미국 뉴욕에서 ‘북미지역 투자자 라운드 테이블’을 마련하고 11억5000만달러 규모에 해당하는 미국 글로벌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낸 점은 성과로 꼽힌다. 윤 대통령은 13개 미국 기업과 ‘북미지역 투자자 라운드 테이블’을 마련했다. 이 중 반도체, 바이오, 정보통신기술(ICT), 2차 전지, 신재생에너지 등 7개 글로벌 회사와 11억5000만달러 규모의 투자 약정을 체결했다.
윤 대통령은 마지막 일정으로 캐나다로 이동해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한·캐나다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 정상은 공동연설문에서 “세계적인 광물 생산국인 캐나다와 반도체, 배터리 주요 생산국인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며 “팬데믹 이후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위해 양국 정부와 기업 간 광물자원 분야 협력 체계를 구축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