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펜폴즈가 만들던 치료용 와인은 어떻게 호주 ‘국대 와인’이 됐나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1844년 의사 펜폴즈, 의료용 달콤한 주정강화와인 생산 와이너리 설립/1951년 초대 수석와인메이커 맥스 슈버츠 호주 최초 프리미엄 스틸 와인 ‘그랜지’ 만들어 호주 국가문화재 등극/와인메이커 돈 디터-존 듀발-피터 가고로 이어진 혁신 DNA 

 

경영진 앞에 선 와인메이커. 회초리 든 선생님 앞에 불려나간 학생처럼 이마엔 진땀이 송글송글 맺힙니다. 아니나 다를까. 들려오는 건 매서운 호통 소리. “때려치우게. 말도 안 되는 드라이한 와인을 만들다니. 누가 그런 와인을 마신다는 말인가. 당신 미친 것 아닌가”. 호주 와이너리들이 대부분 달달한 포트와인을 만들던 시절이니 경영진이 격노한 것은 당연합니다.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겠죠.  하지만 보르도 와인을 능가하는 최고의 호주 스틸 와인을 만들겠다는 와인메이커의 열정은 꺾지 못했답니다. 그는 회사 몰래 매년 조금씩 자기만의 레드 와인을 만들었고 결국 호주 국가문화재로 선정된 단 하나의 와인이 탄생합니다. 바로 펜폴즈 그랜지(Penfolds Grange).  집념의 남자는 호주 와인의 역사를 바꾼 펜폴즈 최초 수석와인메이커 맥스 슈버츠(Max Schubert)입니다.

 

펜폴즈 초대 수석와인메이커 맥스 슈버츠. 출처=홈페이지

◆의료용 포트와인 생산 펜폴즈의 등장

 

BIN 407, BIN 389, BIN 333, BIN 311, BIN 138, BIN 28, BIN 8, BIN 2. 화학 기호 같은 번호가 병에 적힌 ‘빈(BIN) 시리즈’ 와인이 있습니다. 와인을 많이 마셔본 이들도 숫자로 와인 이름을 표기하다보니 헷갈릴 때가 많죠. 포도밭 구획 번호인데 ‘BIN 95’가 호주 국가문화재로 등재된 펜폴즈 그랜지랍니다. 사실 펜폴즈는 달달한 포트와인만 만들던 와이너리였습니다. 그런 곳이 어떻게 호주 국가대표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로 성장했을까요. 최근 펜폴즈 브랜드 앰배서더로 임명된 조현철 소믈리에(라빈리커스토어)와 함께  펜폴즈의 역사를 따라갑니다. 그는 한국국가대표소믈리에대회 세차례 우승(2017년·2018년·2020년), 소펙사 코리아  한국소믈리에대회 우승(2018년), 코리아 소믈리에 오브 더 이어 우승(2021년) 등 국내 주요 소믈리에 대회를 모두 휩쓸었습니다. 펜폴즈 와인은 금양인터내셔날에서 수입합니다.

 

조현철 소믈리에
펜폴즈 매길 에스테이트. 출처=홈페이지
매길 에스테이트. 출처=홈페이지

1844년 영국인 의사 크리스토퍼 로손 펜폴즈(Dr. Christopher Rawson Penfolds )가 호주로 이주하면서 호주 와인 역사를 혁명적으로 뒤바꾸는  첫걸음이 시작됩니다. 1800년대 중반은 호주 와인 산업이 태동하던 시기. 당시 와인은 대부분 포르투갈이 고향인 달달한 주정강화 와인, 포트와인이었습니다. 빈혈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작은 병원을 운영하던 펜폴즈는 의료용으로 포트와 셰리 와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맛으로 소문나면서 수요가 점점 늘자 1844년 아예 남호주의 유명 와인산지 애들레이드의 매길 에스테이트(Magill Estate)에 펜폴즈 와이너리를 설립합니다. 포트, 셰리 외에 리슬링과 묽은 레드와인 클라렛(clarets)을 만들었는데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사실 와인을 만든 이는 펜폴즈가 아니라 부인 메리(Mary). 그녀는 1870년 남편이 사망한 뒤 레드 와인과 리슬링 와인을 중심으로 사업을 대폭 확장해 1884년에 펜폴즈는 남호주 와인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와이너리로 성장합니다. 이어 1907년에는 호주 최대 와이너리에 등극합니다. 

 

1920년대 펜폴즈 와인 프로모션. 출처=홈페이지
1948년 유럽을 방문한 맥스 슈버츠. 출처=홈페이지

◆호주 와인의 역사를 바꾼 와인메이커의 집념

 

대부분 저가의 테이블 와인과 포트를 생산하던 펜폴즈에 1948년 혁신의 바람이 붑니다. 맥스 슈버츠(Max Schubert)가 초대 수석 와인메이커를 맡으면서부터죠. 그는 더 나은 포트와 셰리 와인을 만들기 위해 1948년 보르도를 방문했는데 40∼50년 묵은 올드 빈티지 레드 와인들을 마시고는 깜짝 놀랍니다. 이에 호주에서도 수십년 숙성시킬 수 있는 스틸 와인을 만들기로 작정하지만 난관에 봉착합니다. 보르도처럼 좋은 포도밭, 기후, 토양, 테크닉도 있었지만 보르도를 대표하는 품종 카베르네 소비뇽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펜폴즈 와인들
펜폴즈 그랜지 1950년대 빈티지. 출처=홈페이지

당시 호주는 대부분 쉬라즈만 심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쉬라즈로 1951년 호주 최초의 프리미엄 스틸 와인을 빚는데 바로 그랜지의 최초 빈티지입니다. 당시 이름은 ‘그랜지 에르미타쥐(Grange Hermitage)’ . 프랑스 북론의 최고급 시라 와인 산지인 에르미타쥐를 와인 이름에 붙인 것을 보면 우아한 론 스타일의 쉬라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나 봅니다. 현재 그랜지 1951은 매년 경매에서 호주 와인 최고가를 경신하는 와인으로 유명합니다. 

 

펜폴즈 그랜지 에리미타쥐 1953. 출처=홈페이지
펜폴즈 그랜지 에르미타쥐 1955. 출처=홈페이지

처음에는 550ℓ  새오크 5개 배럴과 5000ℓ  올드배럴에서 만들었는데 새오크에 담은 와인이 시간이 지나면서 오크향과 과일향이 더 잘 어우러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1952년엔 새오크로만 만듭니다. 이어 1953년에는 지금처럼 카베르네 소비뇽을 소량 블렌딩한 그랜지 레시피가 완성됩니다. 슈버츠는 이렇게 몇년을 몰래 만들다 재고가 늘면서 경영진에 탄로 났고 더 이상 스틸 와인을 만들지 말라는 엄명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소량 생산하면서 실험을 거듭했고 결국 1955년 빈티지가 1962년 시드니 와인쇼에서 금메달을 받으면 펜폴즈의 황금기가 활짝 열립니다. 슈버츠는 1987년 올해의 와인메이커로 선정됐고 50번째 빈티지인 그랜지 2001은 호주 국가문화재 반열에 오릅니다. 또 그랜지 2008년 빈티지는 와인스펙테이터와 로버트 파커에게서 동시에 100점을 받은 최초의 호주 와인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슈버츠는 1975년까지 펜폴즈 와인 양조를 이끕니다.  

 

펜폴즈 그랜지 2008. 출처=홈페이지
호주 주요 와인산지

◆혁신을 향한 와인메이커들의 열정

 

“펜폴즈가 유명해 진 것은 비싼 와인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호주 최초의 프리미엄 스틸 와인을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펜폴즈는 혁신으로 시작했고 혁신으로 남을 것이라고 얘기하죠. 끊임없는 모험 정신으로 펜폴즈는 샴페인 띠에노(Thienot)도 만들었어요. 1990년에는 호주 쉬라즈 묘목을 미국 나파밸리 세인트헬레나에 옮겨 심어 20∼30년동안 연구하고 있어요. 아마 내년쯤 그랜지의 나파밸리 와인이 소개될 겁니다.” 조현철 소믈리에는 펜폴즈가 호주 국가대표 와인 자리에 오른 배경으로 ‘끊임없는 혁신’을 꼽는군요.

 

펜폴즈 샴페인 띠에노 빈티지 2012. 출처=홈페이지
펜폴즈 이든밸리 포도밭. 출처=홈페이지

또 하나. ‘멀티 빈티지· 멀티 리즌’도 펜폴즈의 장점으로 얘기합니다. “프랑스 부르고뉴는 특정마을 특정밭, 특히 모노폴에서 만든 와인을 최고로 꼽지만  펜폴즈의 장점은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최고급 포도밭의 포도를 섞어 최고 와인을 만들죠.”

 

펜폴즈 2대 와인메이커 돈 디터와 3대 와인메이커 존 듀발. 출처=홈페이지

펜폴즈의 혁신 DNA는 와인메이커들을 통해 전해집니다. 슈버츠부터 현재 피터 가고(Peter Gago)까지 펜폴즈를 이끈 와인메이커는 모두 4명. 2대 와인메이커 돈 디터(Don Ditter)의 역작은 빈707로 그랜지보다 가격이 바싼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입니다. 3대 존 듀발(John Duval)의 대표작은 RWT BIN 798. 와인 이름 RWT는 펜폴즈가 고품질 레드 와인을 만들기 위해 1995년 시작한 프로젝트 ‘Red Winemaking Trial’의 약자입니다. 이 와인은 바로사밸리에서만 생산된 쉬라즈 단일 품종으로 만들며 1997년이 첫 빈티지입니다. 멀티 리즌을 내세웠던 기존의 펜폴즈와는 결이 완전히 다르네요.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그랜지가 멀티 리즌·미국 오크로 빚은 와인인 반면, RWT는 단일지역·프렌치오크 와인입니다. 

 

펜폴즈 바로사밸리 42블록 올드바인 쉬라즈. 출처=홈페이지
RWT BIN 798

“미국 오크는 쵸콜릿, 바닐라, 코코아 같은 달콤함이 더 느껴지죠. 그래서 그랜지는 파워풀하고 스위트하며 스파이시한 느낌이 더 많아요.  RWT는 블랙베리, 블루베리의 과일맛이 예쁘게 다듬어졌고 더 풍만한 느낌이네요. 2017 빈티지는 입안에서 오키한 느낌보다 과일의 복합미가 확 치고 올라옵니다. 숙성되면 어떻게 발전될지 기대됩니다. 존 듀발은 좀 더 프렌치스런 와인을 만들고 싶어 했어요. RWT는 그랜지 스타일에 좀 더 섬세하고 풍부한 과일맛과 우아한 프렌치 스타일을 더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호주 몽라셰’로 불리는 샤도네이 야타나(Yattana)와 론 GSM 블렌딩인 빈 138도 그의 작품이죠.” 흙내음, 타르, 그린올리브, 로즈마리 향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고 아몬드 크루아상, 시나몬 브레드, 크림브륄레도 느껴집니다.  

 

펜폴즈 맥라렌 베일 쉬라즈. 출처=홈페이지
펜폴즈 생 헨리 쉬라즈

반면, 생 헨리 쉬라즈(St. Henri Shiraz)는 쉬라즈 100%이지만 바로사밸라, 맥라렌베일, 포트 린콜, 로브, 패써웨이, 클레어밸리, 애들레이드힐즈의 쉬라즈를 모두 사용하는 대표적인 멀티 리즌 펜폴즈 스타일입니다.  1957년 첫 생산된 생 헨리는 50년이상 사용한 대형 오크통에서 숙성해 오크의 영향을 최소화합니다. 검은 올리브, 머스타드, 파슬리 아로마와 부싯돌과 흑연같은 미네랄이 돋보이며 신선한 무화과 등 과일의 산도가 잘 어우러집니다. “내일 당장 먹어도 되고 50년뒤에도 먹어도 되는 클래식 이전의 클래식 쉬라즈라고 할까요. 2018은 향이 엄청 닫힌 것을 보니 안보여줄려고 하는 완강한 느낌이네요. 과일향이 응축된 느낌이고 북론의 꼬뜨로띠나 북론 에르미타쥐 느낌도 있군요. 풍부한 과일 느낌과 꽃향기가 어우러지고 오크향은 거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일향은 좀 누그러지고 숙성향이 올라오면서 더 좋아질 겁니다.”

 

펜폴즈 쿠나와라 테라로사 토양. 출처=홈페이지
펜폴즈 빈407 카베르네소비뇽

펜폴즈 BIN 407은 카베르네 소비뇽 단일 품종 와인입니다. 붉은 흙인 테라로사 토양으로 유명한 쿠나와라를 비롯해 패써웨이, 와튼블리, 맥라렌베일, 바로사밸리 포도로 만듭니다. “돈 딕터의 카베르네 소비뇽 역작 BIN 707을 겨냥해 존 듀발이 프렌치 느낌으로 만든 와인이 BIN 407이죠. 남호주의 좋은 지역 포도는 다 갖다 썼네요. 쿠나와라와 서호주 마가렛리버의 카베르네 소비뇽이 유명해요. 쿠나와라는 민트향이 엄청 나죠. 마가렛리버가 좀 더 보르도스럽답니다. 패써웨이는 바로사밸리만큼 덥고 비가 잘 안와요.  2만원대 진한 호주 와인은 거의 패써웨이 와인이죠. 더운데 땅이 싸니 드문드문 큰 농장형으로 포도를 재배합니다. 펜폴즈는 그런 포도밭 특징을 다 가져와서 유니크한 와인을 만든답니다. 스월링할수록 멘솔, 민트 등 쿠나와라 카베르네 소비뇽의 특징이 잘 올라옵니다. 그린페퍼, 까시스와 토마토 잎도 은은하게 나네요. 칠레 카베르네 소비뇽은 유칼립투스 같은 다크한 느낌이고 쿠나와라는 스위트한 느낌의 민트로 좀 달아요. 재미있는 것은 숙성되면 멘솔향이 마법처럼 없어지면서 정말 좋은 보르도 와인처럼 변해요. 와인이 영할때 멘솔향이 많이 나죠.”

 

펜폴즈 BIN 138 SGM

펜폴즈 BIN 138 2015는 바로사밸리의 쉬라즈 68%, 그르나슈 22%, 마타로(무르베드르) 10% 와인입니다. 존 듀발이 만든 프랑스 남론 GSM 스타일 와인이죠. 세 품종 첫 글자를 딴 GSM은 전세계적으로 수학 공식처럼 사용하는 블렌딩입니다. 샤토네프뒤파프, 지공다스, 바케라스 등의 마을이 고급 GSM을 생산하는 곳이죠. 생산자마다 주품종이 다르고 블렌딩 비율도 매년 다릅니다. 보통 가장 많은 품종을 앞에다 넣습니다. 이 와인은 쉬라즈를 베이스로 했으니 SGM이네요. 쉬라즈 베이스는 파워풀하고 잘 익은 블루베리, 블랙베리 느낌이 많고 스파이시한 향이 특징입니다. 그르나슈 베이스는 과일맛이 도드라지며 플럼, 자두잼같은 진한 맛과 향이 납니다. 무르베드르 베이스는 흙냄새, 가죽향 등 육감적이고 동물적인 느낌이 엄청 강합니다. “블렉베리, 다크체리, 허브향이 은은하게 올라오고 매운 듯한 멘솔과 민트류 느낌의 허브향도 더해지네요. 더운 바로사밸리 포도로 만들었지만 생기를 주는 산도가 BIN 138의 특징입니다.”

 

펜폴즈 애들레이드힐즈 포도밭. 출처=홈페이지
현 펜폴즈 와인메이커 피터 가고. 출처=홈페이지
펜폴즈 야타나
펜폴즈 BIN 311 샤르도네

펜폴즈 BIN 311 2018은 샤르도네 100%입니다. 현재 와인메이커 피터 가고의 작품으로 2000년대 초반 첫 출시됐습니다. ‘쁘띠 야타나’로 불리며 호주 최남단 섬 태즈마니아와 애들레이드힐즈, 툼바룸바 포도를 사용합니다. 신선한 감귤, 자몽, 복숭아, 메론향과 기분 좋은 산미와 미네랄이 돋보입니다.  “야타야는  새오크 60%를 쓰고 BIN 311은 33%만 사용해서 좀 더 신선하면서고 미네랄도 더 느껴집니다. 더운 지역 와인들은 브레드 앤 버터, 버터리, 코코넛, 엄청 잘 익은 바나나와 높은 알콜올이 올라와요. BIN 311은 신선함과 살구, 덜 익은 복숭아향이 은은하게 묻어나는 군요. 몽라셰와 나파밸리 샤르도네의 중간쯤에 있는 와인으로 둘의 절반도 안 되는 착한 가격이니 가성비가 아주 뛰어난 매력적인 와인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