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고용 보장, 노조는 임금 양보… ‘사회적 타협’ 이뤄야 [연중기획 - 국가 대개조 나서자]

상생의 노사관계 구축

‘노란봉투법’ 도입 놓고 노·정 충돌 예고
尹정부 적대적 노사관계 고착화 우려

역대 정부 노사정 사회적 합의 ‘물거품’
친노동 선언 文정부서도 분규 더 늘어

주 52시간제 개편 등 놓고 올 하투 치열
글로벌 경쟁력 강화 목표 ‘빅딜’ 이뤄야

법·제도 정비해 노사관계 뒷받침 절실
파업 문제 교섭력 균형 맞추기 초점을

윤석열정부의 노동 개혁 과제인 ‘상생의 노사관계 구축’이 중대 기로에 섰다. 이번 정부 들어 적대적 노사관계가 더욱 고착화할 것이란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야당이 불법 파업의 손해배상·가압류를 금지하는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을 밀어붙이면서 노사관계가 격랑 속으로 빠져들 조짐이다. 민주노총은 오는 11월 노동자대회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10만명 참여를 추진하는 등 대정부 투쟁 강도를 높이고 있다. 각계에선 노사 강대강 대치 국면에서도 정부가 흔들림 없이 사회적 대화를 통한 관계 개선을 시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 24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들이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앞에서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악 저지' 조합원 총궐기 선포 결의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노사관계 악화일로… “정부가 주도권 쥐고 나서야”

2019년 세계경제포럼(WEF)의 노사 협력 부문 평가에서 한국은 평가대상 141개국 중 130위를 기록했다. 2007년 131개국 중 55위를 기록한 것에 비해 크게 하락한 것으로 국내 노사관계가 상당히 악화됐음을 의미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경제보고서에서 “잦은 노사 분규가 국가경쟁력을 저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후진적 노사관계의 개선이 노동 개혁 급선무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진보 정권도, 보수 정권도 노사관계는 악화일로였다.

김태기 단국대 명예교수는 27일 통화에서 “노사는 원래 긴장 관계일 수밖에 없다”며 “이번 정부에서 유독 사이가 나쁘다는 전제를 깔고 접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역대 정부는 사회적 합의를 전제한 노사관계 개선을 추진해왔으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노사 당사자 일부가 불참한 ‘반쪽짜리’ 합의에 그치거나 불발된 경우도 있었다. 더러는 부작용을 낳았다. 문재인정부에서는 공공 부문 노동이사제로 대표되는 노동권 신장을 이끌었으나 노조 파업을 위시한 노사 갈등을 되레 키웠다는 평가다. 임기 5년 동안 연평균 노사 분규 건수는 120건으로 보수 정권인 박근혜정부(102건), 이명박정부(97건)보다 많다. 노사 분규로 인한 연평균 근로손실일수는 56만8400일로 집계돼 전임 두 정부보다 적었는데, 어려운 경제 여건과 국민 정서 등을 고려해 장기 파업을 줄인 결과로 분석된다.

박근혜정부에서는 2015년 노사정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노동시장 구조 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에 합의했다. 그러나 정부가 저성과자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를 밀어붙이면서 한국노총이 이듬해 합의 파기를 선언해 물거품이 됐다. 이에 앞서 노무현정부도 집권 초기부터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 끌어들이려 공을 들였으나 실패했다.

노사관계가 평행선을 달리는 동안 경제적 피해도 상당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전문 연구 기관 파이터치연구원의 ‘노동조합이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과 2019년을 비교했을 때 일자리는 연평균 1.0%(17만개), 실질 GDP 0.7%(10조원), 총 실질 소비 1.6%(15조원), 총 실질 투자는 0.7%(2조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는 정부가 전임 정부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사회적 대화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이광택 한국 국제노동기구(ILO) 협회장은 “사회적 대화가 그간 형식적으로는 있었지만, 내용이 없었다.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촌평했다. 이어 “사회적 합의를 하더라도 집행력이 떨어져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노사 당사자가) 모두 참여해 원만한 합의를 내려면 대통령이나 행정부 책임자가 주도권을 쥐고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유독 뜨거웠던 여름… 선진화 해법은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노동계의 여름 투쟁 ‘하투’(夏鬪) 시기인 6∼8월의 노사 분규는 올해 39건이 발생해 최근 5년 평균(37건) 건수를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저임금법 개정 문제 등이 얽혀 노동계의 대정부 투쟁이 극심했던 2018년(42건)에 비해서는 소폭 줄었으나, 2020년(28건)과 지난해(34건)에 비하면 확연히 늘어난 수치다. 특히 하투가 절정에 이르는 8월만 놓고 보면 20건으로 최근 5년 동안 가장 많은 노사 분규가 일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앞으로 노사 갈등 수위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돼 제어 장치가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계에선 노동 개혁의 핵심인 주 52시간제 및 임금 체계 개편을 결사반대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노란봉투법’ 제정을 하반기 목표로 삼아 총력전에 나설 태세다. 경영계는 경영계대로 근로시간 유연화를 비롯한 규제 완화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개정 등을 요구하면서 정면충돌이 불가피하다. 이에 국정과제인 ‘참여협력적 노사관계 기반 구축’은 구호에 그칠 것이란 우려가 적지 않다.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기본소득당, 무소속 등 현역 의원들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노란봉투법 정기국회 중 처리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각계에선 법과 제도를 정비해 합리적 노사관계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 독일, 일본 등 노사관계 선진국들은 노사가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글로벌 경쟁력 강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두고 있다. 이에 기업은 ‘고용’을 보장하고, 노조는 ‘임금과 근로 유연성’을 양보하는 빅딜 협상이 정착돼 있다.

특히 이들은 노조의 방어 수단인 파업 요건이 까다롭고 파업 시에도 대체 근로를 허용해 노사 간 교섭력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파업 개시가 어렵지 않고, 대체 근로는 사실상 금지돼 노사 분규가 잦은 원인으로 지목돼왔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은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노사관계 개혁이 절실하다”며 “경직된 노동 규범으로 혁신 동력이 상실됐다”고 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