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가족, 신과 땅에 대한 사랑을 그린 밀레
가을이 오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명화 가운데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프랑스, 1814∼1875)의 그림들이 있다. 허리를 숙이고 이삭을 줍는 농민들을 담은 ‘이삭 줍는 사람들(The Gleaners)’(1857), 작은 바구니를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인 이들을 그린 ‘만종(The Angelus)’(1857∼1859) 등이다. 이 작품들에는 가을날 농촌에서 펼쳐지는 일상적 순간들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동시에 그 풍경 속 노동의 가치를 경건한 공기가 감싸 보는 이가 자기를 낮추고 비우도록 한다.
밀레가 이러한 작품들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성장 배경의 영향이 크다. 그는 1814년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 그뤼시에서 농부 장루이 니콜라 밀레(Jean-Louis Nicolas Millet)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다와 땅 사이 경계를 절벽들이 구성하는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자랐다. 미술, 문학 등과 멀리 떨어져 아침에 눈을 뜨면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집에 돌아오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할머니가 기도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잠에 들었다. 씨를 뿌리거나 신에게 기도하는 일은 타인의 것이 아닌 그의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농민을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가속했다. 이듬해 파리에서 콜레라가 유행하자 교외 바르비종으로 피하면서부터였다. 퐁텐블로 숲 근처에 자리 잡은 이 작은 마을에는 농촌의 소박함과 너른 들판이 있었다. 동료 테오도르 루소(Etienne Pierre Theodore Rousseau)를 만나 함께 야외에 나가 농촌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수시로 그렸다. 전통적인 회화 바탕 위에 사실적인 세부 묘사를 결합하는 시도도 했다. 마을과 숲, 그 사이 들판에서 창조한 새로운 화풍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파리에까지 미쳤다.
직접 자연을 체험하고 관찰하며 삶의 현실을 반영한 밀레의 작품은 이제 비판보다는 호응의 대상이 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바르비종에 그림을 그리러 찾아왔다고도 하고, 빈센트 반 고흐가 작업 초기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밀레를 다수 언급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고흐가 초기 대표작인 ‘감자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1885)을 통해 농민 화가로 알려지고자 했던 이유도 여기서 온다.
#‘키질하는 사람’부터 ‘건초 더미: 가을’까지
밀레의 작품을 다른 바르비종 화가들과 구분시키는 것은 인물의 등장이다. 그는 ‘키질하는 사람’부터 자연 풍경보다 농민의 삶에 초점을 맞춰 그렸다. 농민의 움직임을 단순히 포착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가치를 진실로 알고자 했다. 그의 그림에서 전해지는 숭고함은 분명 농민의 소박한 삶과 노동의 신성함에서 비롯할 것이다. 작가는 이와 관련해 다음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나를 사회주의자로 생각하더라도 미술에서 나를 가장 자극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측면이다.”
밀레는 몇몇 커미셔너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는 사업가 프레데리크 아르만(Frederic Hartmann)도 있었다. 아르만은 1868년 밀레에게 사계절 연작을 요청했는데 그는 죽기 직전까지 이 연작을 이어가며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담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가을의 모습을 남긴 작품이 특히 다수인데 농촌에 가장 다양한 풍경이 펼쳐지는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칠면조 무리가 있는 가을 풍경(Autumn Landscape with a Flock of Turkeys)’(1872∼1873)은 사계 연작 가운데 가을 풍경을 그린 작품 중 하나다. 바람에 나뭇잎이 날아가기 시작하는 모습에서 쓸쓸한 가을 기운이 전해진다. 그런데도 뒷모습을 보이는 여인은 먹이를 찾는 칠면조들을 묵묵히 지킨다. 멀리 샤이앙에르라는 작은 마을의 탑이 보인다. ‘건초 더미: 가을(Haystacks: Autumn)’(1874) 역시 마찬가지로 사계 연작에서 가을을 그린 작품이다. 여기 이삭 줍는 사람들마저 떠난 들판에 양들이 펼쳐져 풀을 뜯고 있다. 구름에 그림자가 지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양 떼 뒤로는 거대한 건초 더미 세 개가 쌓여 있다. 가장 왼쪽에 자리 잡은 건초 더미 앞에서 농부는 여전히 건초를 성실히 모은다. 이삭 줍는 사람들마저 떠난 들판에 홀로 남았지만 게으르게 굴지 않는다.
두 작품은 모두 스케치처럼 가볍게 그려져 느슨하게 마무리되어 있는데 이는 밀레의 말년 작업 스타일이다. 작품들은 밑그림으로 그린 드로잉의 흔적과 낮은 채도의 라일락 색상 밑칠도 그대로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1, 2년 전 완성한 결과물이기에 이러한 작업 방식이 특히 잘 드러나고 있는 듯싶다. 사계의 끝과 같은 생의 끝, 겨울을 앞두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때 작가는 이 그림을 그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낮에 두어 번 가을을 느낀 게 전부인데 겨울 같은 바람이 분다. 밀레가 그린 가을 풍경들을 보며 그가 수십 년간 농촌 풍경과 사람을 그리며 한 생각을 한참 헤아려보려 한다. 가을을 붙잡기 위한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