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 옷을 입었다가 이내 녹색 잔디 빛을 내며 반짝인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자연의 보석함이 지상에 놓인 듯하다. 벽면은 모두 거울처럼 빛을 반사해 바깥 풍경으로 비출 뿐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가로세로 각각 5미터, 높이 3미터쯤 돼 보여 건물이라기엔 작은데 이상하게 문이 보인다. 이 건축물은 뭘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곳은 대전시립미술관 개방형 수장고 입구다.
대전 서구 둔산대로에 위치한 대전시립미술관이 이달 초부터 개방형 수장고와 복원을 마친 백남준의 ‘프랙탈 거북선’을 선보이고 있다. 개방형 수장고는 박물관에서 시도된 적 있지만 공공미술관 중에서는 처음이다.
개방형 수장고는 미술관 본관에서 전시 중일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명작들을 수시로 볼 수 있고, 평소 작품이 어떻게 보관되는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선반장에 옹기종기 모여 각자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장품들은 아무런 꾸밈 없이도 그 자체로 아우라를 풍겨, 어쩌면 작품의 힘을 더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미술관은 5년에 걸쳐 수장고 전체를 새로 건립하면서 지하 1층 일부 공간을 관람객에 개방하고 ‘열린 수장고’라고 이름 붙였다.
신비로운 입구에서 호기심에 이끌려 문을 열면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나오고, 이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미술관과 연결된 지상 1개 층, 미술관과 수장고 입구까지 연결되는 지하 2개 층, 연면적 약 2654㎡에 달하는 지하세계다.
이 중 ‘열린 수장고’에 도달하면 가장 먼저 세기의 거장 백남준의 ‘프랙탈 거북선’이 온전히 복원돼 늠름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환영하고, 거북선의 호위를 받는 듯한 미술품들이 놓여 있다. 소장품 1357점 가운데 73점이 ‘열린 수장고’에 나와 있는데, 미술관 측은 ‘열린 수장고’에 놓이는 작품도 정기적으로 교체할 예정이다.
‘프랙탈 거북선’은 온전히 복원된 모습 주변에 백남준 작품 활동을 촬영한 사진작가 임영균의 ‘백남준의 기억’ 연작, ‘프랙탈 거북선’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보여주는 연표, 백남준의 상상을 현실로 구현했던 이정성 테크니션의 인터뷰 영상 등이 전시·상영되고 있어 그 자체로 백남준 상설전이 됐다. 작은 규모임에도 알차게 배치된 연구 결과와 콘텐츠가 작품을 받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프랙탈 거북선’은 그간 우여곡절이 적잖았다. 1993년 대전엑스포를 기념하며 백남준이 제작한 것으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있는 ‘다다익선’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백남준 작품이다. 309개 텔레비전과 앤틱오브제가 결합된 걸작이다. 그럼에도 엑스포 종료 후 당시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방치됐고 이따금 외부 전시에 옮겨지다가 2001년 대전시립미술관 로비에 자리를 잡았다. 로비가 좁아 거북선 날개를 다 펴지 못한 채 놓였다. 작품에 다시 숨이 불어넣어진 건 4년 전부터였다. 2018년 정밀진단, 2019년 재가동, 2020년 도면 제작을 거쳐 올해 한층 안정된 환경에 놓이게 된 것이다. 보석상자에 숨겨놓듯 보물처럼 자리한 ‘프랙탈 거북선’은 외부에 모습을 전부 드러내고 있을 때와는 다른 반전 효과를 주고 있다.
작지만 눈에 띄는 수장고 입구를 만들게 된 뒷이야기도 흥미롭다. 작지만 화려하게 반짝이는 입구 건축물은 실은 매우 간단하게 만들어졌다. 원래 투명한 유리건축물이었던 것을 미술관 관계자들이 아이디어를 내 홀로그램 시트지를 붙였다. 돈도 얼마 들지 않았다. 처음엔 외부 햇빛을 차단할 필요가 있어 고민하다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한다. 외부의 시선은 그대로 반사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호기심을 품게 하고, 한밭수목원 한가운데 위치한 미술관 주변 풍경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문을 통과하면 만나게 될 백남준의 ‘프랙탈 거북선’을 비롯한 보석 같은 소장 미술품을 떠올리면, ‘소장품들의 집’에 걸맞은 입구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선승혜 관장은 “예술이란 아이디어와 의지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