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알제리 출신 불법체류자가 12살 소녀를 살해한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정부의 이민정책을 강력히 비판해 온 우파 진영은 프랑스와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합성한 ‘프랑코사이드’(Francocide)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맹비난하고 나섰다. 최근 대통령에 이어 총리까지 알제리를 방문하며 관계 개선에 공을 들인 프랑스 정부로선 난처한 기색이 역력하다.
18일(현지시간) 영국 BBC에 따르면 알제리 출신 불법체류자가 저지른 살인사건이 프랑스 민심을 뒤흔들고 있다. 지난 14일 파리 북동부에서 여행 가방에 담긴 12살 소녀의 시신이 발견돼 시민들한테 큰 충격을 줬다. 경찰은 인근 폐쇄회로(CC)TV를 확인한 뒤 A(24)라는 여성을 용의자로 특정하고 수사를 벌인 끝에 그를 체포했다. A씨가 소녀를 살해한 뒤 그 시신을 유기하는 데 도움을 준 혐의로 남성 B(43)씨도 함께 입건됐다.
희생된 소녀는 부검에서 질식 및 경부압박 징후와 함께 심폐기능 부전을 겪은 것으로 드러났다. 소녀의 얼굴과 등, 그리고 목에서 상처가 발견되는 등 학대 정황도 포착됐다. 다만 A씨가 왜 소녀를 살해했는지는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다. 경찰은 소녀의 어머니와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던 A씨가 얼마 전 그 어머니한테 부탁을 했다가 거절당한 정황을 잡고 복수심에 소녀를 살해한 건 아닌지에 염두에 둔 채 수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권에선 A씨가 알제리 출신 불법체류자로 지난 8월 프랑스 출입국 당국으로부터 “1개월 안에 프랑스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점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이민에 부정적인 우파는 왜 1개월이 지나도록 출국명령이 이행되지 않았는지, 애시당초 A씨 같은 사람의 프랑스 입국을 무엇 때문에 받아들였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이다. 극우파 마린 르펜을 비롯한 우파 진영은 20일 대규모 집회를 열고 마크롱 대통령과 현 정부를 강력히 성토한다는 방침이다. BBC에 따르면 지난 대선 당시 마크롱 대통령과 맞섰다가 패배한 르펜은 “이런 야만적인 범죄의 용의자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니, 말도 안 된다”며 정부의 느슨한 이민정책을 비판했다.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다독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전날 희생된 소녀의 부모를 엘리제궁으로 초청해 위로하며 “정부가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는 “지금은 희생자를 애도하고 그 유족을 위로해야 할 시기”라며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가해자를 응징하는 일은 경찰과 사법부에 맡겨 달라”고 말했다. 불법체류자가 범죄 용의자라고 해서 너무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만 범죄 용의자의 국적이 알제리라는 점은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용의자 A씨는 6년 전에 학생 비자로 프랑스에 입국한 것으로 확인됐다. 체류 기간이 끝나 출입국 당국에서 출국 명령을 받았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버티다가 끔찍한 범행까지 저지른 것이다.
알제리는 19세기 초 프랑스에 점령당한 뒤 1962년까지 150년가량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그에 따른 ‘죄책감’ 때문인지 프랑스는 유독 알제리 국민에 대해선 프랑스 입국 등에서 관대한 태도를 취했고, 이는 우파 진영으로부터 ‘프랑스 사회 곳곳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비난을 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프랑스는 알제리와의 협력이 더욱 중요해졌다. 러시아가 천연가스의 유럽 수출을 사실상 중단해 올가을과 겨울 에너지 대란이 우려되는 가운데 천연가스 매장량이 풍부한 알제리가 새로운 가스 공급국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근 마크롱 대통령이 알제리를 방문해 “더 많은 알제리 국민이 프랑스에 입국할 수 있도록 요건을 완화하겠다”고 약속한 데 이어 보른 총리도 알제리로 날아가 기스 등 에너지 분야에서 양국 간 협력을 강화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런 상황에서 알제리 출신 불법체류자가 살인사건을 저질렀으니 “알제리 국민의 프랑스 입국 과정에서 심사를 까다롭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알제리가 강하게 반발하면 그간 어렵게 다져 놓은 프랑스·알제리 관계는 도로 훼손되는 게 불가피하다. 다수 언론은 “가뜩이나 여소야대 의회에 국민 지지율 하락 등으로 난처해진 마크롱 정부가 더욱 코너로 내몰리게 됐다”는 분석을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