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전 서울 성동구의 한 전시장. 이곳엔 아프리카에 사는 상상 속 파란 코끼리, 빨간 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에 나선 강아지들, 전통 씨름을 하는 마블 히어로 등 독창적인 시선이 담긴 미술 작품 30여점이 전시돼 있었다. 이 그림들을 그린 이들은 모두 발달장애 청소년. 밀알복지재단이 발달장애인 작가 23명의 작품들을 선보이는 ‘제8회 봄 프로젝트 전시회’가 지난 17일 열린 뒤 이날도 전시가 한창이었다.
여러 작품 중 다홍빛의 꽃과 고양이 등 여러 캐릭터가 함께 있는 작품이 눈에 띄었다. ‘봄’이라는 프로젝트에 걸맞은 화사하고 따스한 색깔이 담겼다. 작품의 주인공은 김지우(18)양. 이번 전시에 꽃과 동물들을 테마로 3개의 작품을 선보였다.
지우양은 중증 자폐성 장애인이다. 그가 ‘작가’로 거듭나는 데는 여러 우여곡절이 뒤따랐다. 어머니 신여명(50)씨는 지난 2004년 딸이 장애를 가졌다는 진단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지우양이 18개월 무렵일 때였다. 이름을 불러도 고개를 돌려 보지 않고, 얼굴을 마주해도 쉽사리 눈을 맞추지 못하는 모습에 병원을 찾았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던 신씨는 언어 치료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치료하면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시간 속에 신씨는 우울증을 겪었고, 가족도 함께 힘든 나날을 보냈다.
절망에 빠졌던 신씨와 가족의 삶은 지우양이 유년기를 지나면서 조금씩 힘이 났다. 지우양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말문도 트지 않았지만, 지우양은 점토를 만지고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다. 자기표현 등을 기르기 위해 미술 치료를 받았던 지우양은 미술에 완전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미술 치료를 해주던 선생님도 지우양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힘을 보탰다. 지우양이 전문가로부터 지도받고 자신의 작품을 다른 이들에게 선보일 수 있도록 여러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지난 2014년 초등학생이던 지우양은 밀알복지재단이 미술에 재능있는 발달장애 청소년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의 일원이 됐고, 전시를 시작했다. 신씨는 “5살이 넘도록 말도 못하고 눈도 잘 못 마주치는 아이였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며 “그동안 참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아이가 정말 미술을 좋아하고, 발전하는 모습도 보이면서 가족 모두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마음을 먹고 전폭적인 지지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우양이 본격적으로 미술을 하게 되면서 학교 친구들도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더는 교실에서 관심을 못 받고 조용히 앉아있는 장애인이 아니라 ‘그림 잘 그리는 아이’가 됐다. 선생님이 지우양의 그림들을 교실에 자주 붙이면서 아이들도 지우양에게 다가와 ‘친구’가 됐다. 지우양에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1살에서야 말이 트기 시작한 지우양은 이전엔 말할 기회가 있으면 울음을 터트렸지만, 지금은 자신의 그림을 직접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말주변도 늘었다. 사회성이 낮은 발달장애 특성상 초기 자화상은 눈동자가 옆으로 치우친 측면이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눈동자가 정면을 바라보는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신씨는 “지우가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려는 노력이 담긴 것 같다”고 했다.
재능을 인정받아 세종예술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지우양은 현재 예술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학교 내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기도 한 지우양은 매일 8시간 가까이 그림을 그리고 입시를 준비 중이다. 지난 15일에는 한 예대의 입시 시험을 보기도 했다. 자신의 딸이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신씨는 요즘이 즐겁기만 하다. 지우양이 입시를 준비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이런 일상이 행복하다.
신씨는 앞으로 지우양이 그저 자신의 행복을 추구했으면 바란다는 마음 뿐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큰 인기를 끌면서 동시에 발달장애인에 대한 관심도 뜨겁지만 현실은 다르다. 교육률, 임금 등에서 다른 이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신씨는 “(우리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났지만,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 방법이 우리와 조금 다를 뿐”이라면서 “편견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복지와 교육적인 측면에서 더 평등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우양처럼 자신만의 꿈을 갖고 행복을 찾아 나아가는 발달장애인은 또 있다. 이번 ‘봄 프로젝트’ 전시에 참여한 김용원, 변유빈, 양예준 작가 등도 마찬가지다. 발달장애인 변유빈(20) 작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보육원에 맡겨진 뒤 시설에서 지내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먹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내리듯, 시간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작품 특징이다. 이전에는 매우 예민한 성격이었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타인과 눈을 마주치고 마음을 전하는 데도 익숙해졌다.
양예준(12)군은 초등학교 입학 후 외부 자극에 대한 불안으로 혼잣말하고 연필을 잡고 흔드는 반복 행동을 했었다. 어머니가 벽에 전지를 붙이자 어느 날부터 연필을 흔드는 대신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큰 집중력을 발휘해 수많은 그림을 그려 나갔다. 예준군은 수십 차례 상을 받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지난 21일을 끝으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많은 일반 관객들도 발걸음을 했다. 재단은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봄(Seeing&Spring) 프로젝트’라는 이름에는 발달장애 청소년들의 가능성을 보고, 그들이 예술가로서 성장하길 바라는 희망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