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백발이 성성한 소설가 김주영(83)이 막걸리잔을 들고 왼편에 앉아 있던 역시 백발의 이문열(74) 소설가를 불렀다. 통화 중이던 이문열은 곧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다소곳하게 답했다. “예.” “마셔라.” 김주영은 잔을 단번에 넘겼고, 이문열 역시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서로 다른 작품 세계를 가진 경북 출신 원로 소설가 김주영과 이문열이 지난 20일 저녁 영양 한식당에서 기자들과 함께 만났다. 문어숙회와 반찬, 소주와 막걸리가 가지런히 놓인 테이블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구수한 경상도 말투로 삶과 문학, 우정을 풀어냈다. 이 자리에는 단국대 문예창작학과 학과장인 안도현 시인과 음식시학 이종주 대표,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한 경북문화재단 이희범 이사장 등도 배석했다.
두 사람은 처음 술이나 음식을 비롯해 가벼운 이야기부터 풀어냈다. “이것은 풋고추에 된장을 박아놓은 거거든요. 소주 안주에도 좋고.” 김 작가는 된장이 덕지덕지 붙은 오이고추된장무침이 나오자 환한 미소를 보였고, 테이블 한가운데 있는 문어숙회를 오른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문어(숙회)는 이쪽 지방에서 잔치할 때 반드시 나와요.” 이 작가도 거들었다. “마치 전라도의 홍어처럼 영남에선 꼭 있어야 해요.”
잔에 막걸리를 따른 김 작가는 주위에서 건배를 외쳐도 마시지 않을 땐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면 멈추지 않고 단숨에 마셨다. 이 작가는 소주를 먹었는데, 한 번에 마실 때도 있었지만 ‘꺾어 마실’ 경우도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김 작가의 구수하고 걸쭉한 입담이 샘솟듯 뿜어져 나왔다. 주로 유머가 많았고, 자신의 체험도 적지 않았다. 아내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은행 강도를 저질렀다가 가택 연금 6개월을 선고받은 노인, 오후 세 시 이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마피아, 그림이 20만달러라고 말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피카소, 한 중년 부부의 로또 이야기, 소설가의 독특한 이름에 얽힌 뒷얘기…. 김 작가가 유머와 이야기를 하나씩 시전할 때마다 좌중은 배꼽 잡고 웃기 바빴다. 이 작가 역시 웃음을 머금은 채 하는 말. “형님과 술을 먹으면 팁을 형님에게 줘야 한다고 하는데, 그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죠.”
이문열은 김 작가와 만나기 전인 이날 오후 단국대 문창과와 음식시학, 경북문화재단이 함께 개최한 문학탐방 강연과 기자 간담회에서 소설가로서의 45년을 되돌아보며 “글쓰기를 한 덕에 최악의 삶은 면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중단편 중 이건 제대로 썼네, 라고 싶은 건 ‘필론의 돼지’”라고 꼽았다. 작품은 군인들이 탄 열차 안에서 벌어진 혼란과 폭력의 악순환을 다뤘다.
앞으로의 글쓰기에 대해선 확답하지 않았다. 그는 “내 나이도 그렇고 집필이 어렵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원대한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꿈 자체가 어려워졌고, 세상을 섣불리 말할 수 없는 느낌이 들어요. 인터넷 문화 등이 끼어들며 좌우 이런 것들이 낯선 세계가 됐죠. 악당과 보안관이 구분돼야 하는데 뒤섞인 시대이고요. 지배체제든 사상이든 파격적인 게 형성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저는 그걸 할 능력이 안 돼요.”
김 작가 역시 이 작가와의 만남에서 자신 역시 더는 의미 있는 작품을 쓰지 못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워낙 건강하고 유머도 많아서 쉬이 믿을 순 없었지만. “정말 이제는 끝이에요. 제가 아는 맞춤법과 젊은 사람들이 아는 맞춤법이 완전히 틀리더라고요. 젊은 사람들의 소설을 한번 읽어보죠. 그런데 솔직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만 써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술자리가 깊어가자 서로에 대한 속내도 조금씩 풀어냈다. 김 작가가 말했다. “이문열씨가 술 먹고 얘기하면 말을 잘 못 알아먹어요. 하지만 글은 아주 분명하게 씁니다.” 옆에서 칭찬 아니냐고 말하자, 그의 덧말. “글 하고 말하고는 전혀 달라요.”
김주영은 이 작가를 만난 다음날 청송 ‘객주문학관’과 ‘객주문학마을’에서 강연과 간담회를 갖고 ‘객주’의 탄생 비화를 비롯해 삶과 문학을 들려줬다. ‘객주’는 19세기 한반도를 누빈 보부상들의 삶과 애환을 맛깔스럽게 그린 그의 대표작. 처음엔 중편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작품을 위해 전국 장터를 답사했고, 자료 조사가 이어지면서 대하소설로 발전했다. 특히 고(故) 박원선 연세대 교수 논문이 결정적이었다. “보부상의 방대한 조직을 그 논문을 통해 알게 됐죠. 연재를 시작하자 교수님이 두 번이나 불러 밥을 사주시더군요.” 그는 “상식에 매몰되지 말라. 상식을 벗어날 때 창의력이 꽃피기 시작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글 쓰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이 만난 그날 밤, 시간은 심야를 향해 내달리고 술잔 역시 여러 순배 어지럽게 돌았을 무렵, 이 작가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20분 이내로 출발하겠다고 답했다. 그 사이 술잔이 다시 돌았다. 20분 뒤, 그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 작가는 결국 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섰다.
10분쯤 지났을까. 김 작가 휴대폰이 울렸다. “왜? 안 가나? 어, 그래? 이리 온나.” 그는 휴대폰을 끊었다. “이문열이 진보까지 갔다가 택시 타고 다시 이리로 온대.” 작은 웅성거림과 흥분이 엿보였다. 잠시 뒤,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좌중의 이목이 더욱 집중됐다. 김 작가는 설명했다. “이문열이 탈출에 실패했대. 진보에서 내려가지고 택시 타고 오려고 했는데, 운전하는 사람이 그의 허리끈을 잡고 있다는 거야.”
팽팽한 흥분이 가라앉고 이 작가 귀가가 분명해지자, 김 작가는 가슴 속에 묻어뒀던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은 죽었지만, 문열이 형이 진보장에 자주 왔었지. 지도 건달이고, 나도 건달이고. 그때는 문열이가 누군지 몰랐는데, 아버지가 좌익 활동을 하는 바람에 여기 와서 핍박을 많이 받았어. 연좌제에 걸려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중퇴를 했지. 형도 그렇게 건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알고 보면 문열이도 불쌍해. 그리하여 이 작가와 인연을 처음 맺기 시작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문열이가 ‘매일신문’에서 기자할 때 나에게 전화해 소설 연재를 하자고 하더라고. 나는 그때 바빠서 못한다고 거절했지. 나중에 알고 보니 문열이가 전화했더라고….
얼마 뒤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서둘러 식당에서 빠져나왔다. 마치 쫓기는 패잔병처럼. 결국 “오늘 밤 많이 못 먹어요, 내일 아침 일어나지 못해”라고 말한 김 작가만 이종주 대표와 함께 남긴 채.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보은재에 와서야 수많은 별들이 하늘 깊은 곳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반짝이고 있는 걸 봤다. 그날, 영양의 밤하늘은 유달리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