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울적하고, 사람 많은 곳도 무서워서 약속을 취소했어요.”
경기 고양시 일산에 사는 A씨는 다가오는 주말 아들과 놀이공원에 가기로 한 약속을 취소했다. 아이는 기대했던 나들이를 가지 못해 속상해했지만 혹시 모를 안전에 대한 우려와 ‘이태원 압사 참사’에 대한 추모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A씨는 “다들 이태원 참사로 슬퍼하고 있는 상황에서 바로 아이와 놀이공원에 가는 건 마음이 불편했다”며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게 불안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3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15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 소식을 들은 시민들의 우울함과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나들이∙술자리 등 약속을 취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전 국민에게 덮친 ‘트라우마’로 인해 상담을 받으려는 사람도 줄을 잇고 있다.
서울 성동구에 거주하는 직장인 김모(28)씨는 이번 주말 예정된 친구들과의 술자리 약속을 취소했다. 번화가인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보기로 했지만, 김씨와 친구들 모두 이태원 참사 이후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만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다. 김씨는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술을 마시고 즐겁게 노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며 “이태원 참사도 즐겁게 놀기 위해 모인 또래들이 사고를 당했다. 번화가 자체를 가는 것이 반갑지가 않다”고 했다.
정부가 국가애도기간을 지난달 30일부터 오는 5일까지 선포하면서 공공기관과 기업들이 회식 자제 등을 권고해 직장인들의 회식도 연달아 취소되는 분위기다. 여의도에 위치한 한 공공기관에 다니는 직장인 B씨는 “추모 기간인 만큼 몰려 있던 회식이 모두 연기됐다”며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도 회식할 분위기도 아니고 조심하자는 의견이 대부분이다”고 전했다.
모임 취소뿐만 아니라 애초에 혼잡한 곳을 가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혼잡한 대중교통을 피해 자가용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시민이 늘고 있다. 서울 강남에 사는 한 직장인은 “평소 서울에서 출퇴근하면서 지하철을 이용했지만, ‘지옥철’이 답답하고 무섭게 느껴져 이번 주부터 정체 구간이 있더라도 차를 타고 출퇴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태원 참사는 국민적인 트라우마를 유발하고 있다.
앞서 지난 2014년 벌어진 세월호 참사 등과 달리 이번 이태원 참사는 일반 시민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시내 한복판에서 발생한 만큼 대중이 받아들이는 불안과 공포가 더 크다는 의견도 있다. 또 사고 당시 인근에 있던 시민들이 참혹한 현장의 모습을 찍은 영상과 사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간 것도 공포심을 증폭시켰다는 분석이다.
직장인 박모(29)씨는 “비슷한 또래가 사고를 당한 것도 큰 슬픔으로 다가왔는데, 자주 가서 놀던 이태원 골목에서 사고가 난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며 “사고 당일 밤 본 영상들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괴로워 했다.
실제 트라우마를 호소하며 상담을 하기 위한 발걸음도 늘고 있다. 각 지자체도 심리 치료 지원 등을 확대하고 있다. 경기도에 따르면 이태원 참사 직후 집중적으로 운영된 도내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에 지난달 31일부터 이날 오전 9시까지 276명이 상담을 요청했다. 하루 평균 90명을 웃도는 수치로 이 중 절반가량이 참사 목격자와 대응 인력인 것으로 전해졌다. 상담을 받은 276명 가운데 고위험군으로 판정된 이들은 3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경기 용인의 한 40대 가장은 아들을 참사로 잃었다며 심적 고통을 호소했으며, 한 20대 청년은 일행 3명이 당일 이태원을 방문했다가 홀로 살아 돌아왔다며 죄책감과 불안감을 토로했다고 한다. 경기도는 고위험군들에게 정신의료기관 이용과 치료비 지원 등을 안내했으며, 관리를 이어갈 계획이다.
서울시도 이번 참사로 트라우마를 겪는 시민이 시내 정신전문의료기관 225곳에서 우울∙불안 검사를 최대 3회까지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서울광장과 이태원 합동분향소에는 심리지원 현장 상담소도 운영 중이다. 이 외에 광주시 등 다른 지역에서도 심리치료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