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해 초 유치원 강사로 취업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20대 A씨는 싸늘한 시신으로 고국인 러시아로 돌아간다.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그는 지난 7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1년 전 한국어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한국으로 왔다”며 “이런 결정은 위험하고 즉흥적이었지만 지금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A씨는 지난달 29일 일어난 이태원 참사로 목숨을 잃었다. 경기 의정부병원에 안치된 시신은 4일 오후 동해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국제여객선에 실려 러시아로 운구된다. 시신 운구비용으로만 1200만원 상당의 비용이 필요했으나 주한러시아대사관 등의 도움을 얻어 우여곡절 끝에 송환이 이뤄졌다.
#2. 지난달 31일 오후 경기 성남중앙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는 이태원 참사 사망자인 10대 일본인 B양의 유족을 태운 차량이 들어섰다. 이들은 B양의 사고 소식을 듣고 이날 급히 입국해 장례식장을 찾았다. B양의 시신은 사고 직후 이곳 장례식장으로 옮겨져 안치됐으나, 유족의 입국이 이뤄지지 않아 빈소는 차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유족은 시신을 확인한 뒤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B양과 함께 안타까운 귀국길에 올랐다. 병원 관계자는 “유족이 시신을 본국으로 옮긴 뒤 그곳에서 장례 절차를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B양 유족은 침통한 표정으로 언론 취재를 사양했고, 장례식장 입구에는 경찰 통제선이 처졌다.
◆ 대다수 외국인, 빈소 없이 시신만 안치…방부처리 이후 고국行
이태원 참사로 이역만리 떨어진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한 외국인 희생자들의 시신이 속속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참사 희생자들의 발인이 이어지는 가운데 앞서 외국인 희생자들의 시신이 안치된 장례식장에선 싸늘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가족이 미처 입국하지 못해 시신만 장례식장에 안치된 뒤 방부처리를 마치면 대사관 직원들이 본국으로 운구하는 식이다. 어렵게 빈소가 꾸려지더라도 친구나 지인들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다 하루 이틀 만에 문을 닫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3일 경기도에 따르면 도내 장례식장에 시신이 안치됐던 외국인은 모두 11명으로 전날까지 단 1명만 발인과 운구를 마쳤다. 이날은 호주인 1명이 발인됐고, 러시아와 일본인 각 1명은 본국으로 운구됐다. 일산동국대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됐던 호주인의 시신은 방부처리를 위해 업체로 옮겨졌다. 4일에는 1명, 5일에는 4명의 외국인 희생자가 발인되거나 본국으로 운구된다. 아직 2명의 희생자는 시신 처리 절차를 확정하지 못했다.
시신 방부처리를 마치고 본국으로 향한 희생자들은 사정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이태원 참사로 숨진 이란인 30대 남성 C씨는 참사 닷새만인 지난 2일에야 안치된 병원을 떠나 본국으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 수원 성빈센트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됐던 그는 도내 한 시신 방부처리 전문업체로 옮겨졌다. 성남중앙병원 장례식장에 머물던 20대 이란인 사망자 D씨의 시신도 유족의 방문 없이 방부처리를 마치고 본국으로 향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참사로 숨진 이란인 5명은 모두 두 사람과 업체를 통해 본국으로 이송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 이란인 가장 많은 5명 희생…일부 유족, 운구비 마련에 어려움 겪기도
이번 참사의 유일한 베트남 국적 피해자인 20대 유학생 E씨의 시신은 지난 2일 오후 인천공항에서 호찌민행 비행기에 실려 본국으로 옮겨졌다. 부천시 순천향대병원에 안치됐던 그의 빈소는 미처 입국하지 못한 가족을 대신해 지인들이 상주를 맡았으나 지난 1일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관계 당국은 도내에 안치된 11명의 외국인 희생자 유족 측과 모두 연락이 닿은 상태로 알려졌다. 유족 중 상당수는 대사관에 시신 인도를 위임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이태원 참사로 사망한 156명 중 외국인 사망자가 26명이라고 밝혔다. 외국인 사망자의 출신지는 이란이 5명으로 가장 많고, 중국 4명, 러시아 4명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