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직장, 미국 실리콘밸리에 감원 칼바람이 불고 있다. 포스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라는 전환기를 맞아 경영실적이 악화하고 있는 거대 정보기술(IT) 기업(빅테크·Big Tech)들이 무더기 인력감축에 나서면서다. ‘목 자르기’가 몇몇 개별 기업 차원을 넘어 산업 전반에 영향을 주며 미국 사회가 동요하자 무차별적 해고보다는 수익성 강화를 위한 사업 재조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빅테크 감원 후폭풍… 브랜드 가치 하락
트위터가 직원 절반(3700명)가량을 감원한다고 밝힌 뒤 아마존과 페이스북의 모기업 메타가 각각 1만1000명과 1만명 인력감축 계획을 밝혔다.
코로나19시대는 주요 빅테크엔 절대호황기였다. 비대면 수요의 폭증과 함께 폭발적 성장을 이루면서 인력채용을 크게 늘렸다. 5대 빅테크로 꼽히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 메타(시가총액 순) 중 아마존을 제외한 나머지 4곳이 지난 1년간 평균 인력을 20%나 늘렸다. 지난 5년 연평균 증가율 10~13%를 크게 웃도는 규모다. 지난 1년간 인력 채용비율이 가장 높은(28.1% 증가) 메타의 경우 지난 5년간 직원 수가 3배 증가했다. 5대 기업에 속하지 않는 트위터도 지난 5년간 직원 수가 2배 늘었다.
포스트 코로나19시대가 되면서 빅테크는 위기에 직면했다. 코로나19의 기세 약화와 함께 인플레이션, 경기둔화가 겹치면서 수익성이 악화하는 등 경영환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2000년대 초 닷컴 버블 붕괴의 재연이 우려되면서 일각에서는 ‘빅테크의 종말’이 거론될 정도다. 채용을 늘리며 몸집을 키우던 빅테크들은 빈약한 실적 성적표에 결국 감원 카드를 뽑아 들었다.
CNBC는 빅테크의 해고 사태에 대해 “한때 꿈의 회사로 선망받던 기업들의 명성이 더러워지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지난 몇 년간 개인정보 유출, 알고리즘 문제 등으로 흠집이 나던 빅테크의 브랜드 가치가 결정적으로 크게 훼손됐다는 의미다.
특히 최근 트위터를 인수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일방통행식 대량 해고와 최후통첩을 남발하는 권위적 조직 운영 방식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직원 운명을 파리목숨으로 여기는 머스크식 해고는 기업 이미지 악화로 이어졌다. 직장 기반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가 직원 절반 해고가 발표된 직후인 이달 7~10일 트위터 직원 44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지인에게 트위터 취업을 권할 것인가’라는 문항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고작 2%였다. 91%는 ‘그렇지 않다’, 7%는 ‘보류’라고 답했다. ‘해고 과정에서 회사가 직원을 존중했는가’라는 문항에서는 95%가 ‘그렇지 않다’고 했고, ‘그렇다’는 응답은 1%에 불과했다.
◆갑자기 해고통고… 흔들리는 인재
릭 첸 블라인드 홍보팀 부장은 “감원은 그들이 쌓아온 브랜드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최근 극적인 감원 소식은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들이 빛을 잃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밝혔다.
최근 사태는 인적 자원의 동요로 이어져 장기적으로 경제·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 메타가 해고 대상으로 지목한 1만1000명 중 한 명인 중국 국적자 토니(가명)는 미국에서 외국인 전문직 종사자에게 발급되는 H-1B 비자 소유자다. 해고되면 60일 유예기간 안에 재취업을 해야 한다. 그는 NBC 방송에 “1년 만에 해고될 줄 알았다면 메타로 이직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구직이 얼마나 어려울지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페니와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은 탓에 실리콘밸리를 떠받치고 있는 해외 인재의 엑소더스가 일어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H-1B 비자 소유자 중 74.5%는 인도, 11.8%는 중국 국적자다. 가우라브 칸나 캘리포니아대(UC) 샌디에이고캠퍼스 경제학 교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은 H-1B 비자로 미국에 온 노동자들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킨다”며 “이제 근로자들은 기술 분야에서 일하기 위해 미국을 택할 가능성이 작다는 의미”라고 진단했다.
빅테크의 감원 폭풍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역대 최대 규모 구조조정 작업에 착수한 아마존은 인력감축이 내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지난 17일 밝혔다.
온라인 구직 플랫폼 집리크루터의 줄리아 폴락 수석 경제분석가는 이번 사태가 경제 전반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기업들은 비용을 절감하고 더 빨리 수익을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것이고, 감원에 더해 클라우드 컴퓨팅, 통신 플랫폼 등 부수적인 기술을 축소하면서 연관된 기업들이 도미노로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벤처캐피털 업체 헤이스택의 세밀 샤 총괄파트너는 향후 몇 달간 실리콘밸리에서 최대 5만명이 실직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어 “IT 인력의 연봉 수준은 내려갈 것이고, 구직자들은 이전에 고려하지 않은 직무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샤는 빅테크 업체들의 감원으로 엔지니어들이 스타트업 인력으로 충원돼 결과적으로 스타트업에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고통스럽지만, 장기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자 IT 생태계가 더 건강해지는 길”이라고 했다.
◆“빅테크서 사람 빼면 뭐 있나” 감원 회의론
빅테크가 수익성 개선을 위해 손쉬운 감원을 택하는 것이 패착이 될 것이라는 경고도 있다. 스티븐 밈 조지아대 역사학 교수는 2008년 기업의 다운사이징 효과에 관한 연구 결과를 근거로 들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공장 같은 물리적 자본이 생산요소의 주축이 되는 제조업에서는 조직을 축소하는 것이 수익성 개선에 효과가 있었으나 인적 자본이 주축이 되는 서비스업에서는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밈 교수는 “메타와 트위터는 로봇이나 공장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제너럴모터스(GM)와는 다르다”며 “빅테크에서 직원들을 빼면 자산이랄 게 없는데 메타와 트위터는 이를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규모 감원은 남아있는 직원의 생산성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1993년 출간된 학술 논문에 따르면 “대량 해고에서 살아남은 직원들은 편협해지고, 위험을 회피하게 된다”고 나타나 있다. 밈 교수는 “이 같은 효과는 빅테크가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잔류하고 있는 인원의 회사 충성도가 낮아질 수 있다는 점도 향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빅테크가 해고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신기술 투자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빅테크 투자자들이 경제 상황이 불확실해지면서 장기적인 성장가치보다는 일단 생존을 위한 수익성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만큼 사업 방향도 이익을 창출하는 분야에 포커스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피치트리 크릭 인베스트먼트의 설립자이자 블룸버그통신의 칼럼니스트인 코너 센은 “투자자들은 수익에 기여하지 않는 일명 ‘과학 프로젝트’에 빅테크가 몰두하는 데 짜증을 내고 있다”고 했다. 연간 50억달러(약 6조7250억원)가량의 손실을 내는 아마존의 음성 비서 서비스인 알렉사나 누적 200억달러(26조9000억원)의 적자를 낸 알파벳의 자율주행차 사업부 등이 그 예다. 메타에서 메타버스 서비스 담당 사업부인 리얼리티랩스는 누적 적자가 100억달러(13조4500억원)에 달한다. 센은 “2010년대 투자자들은 당장 수익성보다 빅테크 업체의 성장가치에 더 주목했지만, 고금리에 더해 경제 성장 둔화에 접어든 지금 투자자들은 수익성에 더 주목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