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경제적 학대’ 신음할 노인들… 정부·은행 뒷짐 풀어야

‘노인 경제적 학대’ 실태와 대책 (下)
한 번 발생하면 처벌·구제 어려워
금융기관 적극적인 예방 노력 필요
전문가, 적극적 예산 투입도 강조

 

A씨는 홀로 사는 노인이다. 한달 수입은 노후연금과 손녀가 보내주는 돈을 더한 50만원이 전부이다. 지난해 전기료와 수도요금이 밀려있는 상황에서, 특수존속폭행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 중인 아들이 외상으로 사용한 택시비 등 사고 수습 비용 1000만원까지 떠안게 됐다.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이 금융권 퇴직자를 선발해 파견한 ‘생활경제지킴이’의 도움으로 밀린 공과금과 택시비 문제는 해결됐다. A씨는 이처럼 경제적 보살핌이 계속 필요한 상황이지만, 생활경제지킴이가 시범사업에 그친 탓에 올해부터 더는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됐다. 

 

A씨와 같이 친족에 의한 경제적 학대에 노출된 저소득층 노인이 많지만, 이를 예방하고 피해를 구제해줄 제도적 장치의 도입은 더딘 실정입니다. 전문가들은 금융기관이 적극적으로 예방에 나서야 하고, 정부도 예산 확보에 힘써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벌’로 예방·구제 어려운 친족에 의한 경제적 학대

 

경제적 학대란 노인 의사에 반하여 재산 또는 경제적 권리를 빼앗거나 통제하는 행위를 이릅니다. 유사한 표현으로 ‘금융 착취’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친족에 의한 경제적 학대가 일단 발생하면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구제하기는 매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보건복지부의 2017∼21년 ‘노인 학대 현황 보고서’를 종합해 보면 가해자 대다수가 노인과 친족 관계이고, 그중에서도 아들·딸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형법상 직계혈족·배우자·동거 친족·동거 가족 또는 그 배우자 간 발생한 사기·공갈·횡령·권리행사방해 등 재산 범죄는 ‘친족상도례’가 적용돼 처벌이 면제되거나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공소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노인복지법에는 노인을 위하여 증여 또는 급여된 금품을 그 목적 외 용도에 사용하는 행위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매긴다는 규정이 있지만, 노후연금이나 기초생활수급비 등을 가로채는 때 한정돼 다양한 형태의 경제적 학대를 처벌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노인 경제적 학대에 친족상도례를 적용하지 않는 내용의 노인복지법 개정안이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 발의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계류 중인데, 처벌을 강화하더라도 노인이 친족을 선뜻 신고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효과가 떨어질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실적으로 노인은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데 매우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며 “자신을 잘 돌봐주든, 잘 돌봐주지 않든 가까운 사람이 재산을 같이 사용하는 것을 두고 선뜻 불만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심리적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노인들이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경제적 학대를 하는 이들은 자신에게 형벌이 내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없을 수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벌을 엄격하게 하는 것으로 예방 효과를 거두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민사 소송으로 경제적 피해를 회복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만 이 역시 현실적 장벽이 큽니다.

 

제 교수는 “친족에 의한 경제적 학대는 대부분 형사 사건이 될 수 없는 탓에 경찰 수사로 얻어야 할 소송 자료를 노인 스스로 다 수집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미국에서는 노인보호전문기관에서 경제적 학대 의심 사건의 관련 금융 기록을 보내달라고 이야기하면 금융기관에서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보내주도록 법이 바뀌었다”며 “이렇게 하면 민사적인 피해 구제가 훨씬 더 쉬워질 수 있지만, 우리 노인보호전문기관은 그런 권한이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 지역 노인보호전문기관 관계자도 “주민센터와 협력해 기초생활수급비가 들어오는 통장을 바꾸는 정도는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으로 법적인 문제가 껴있다고 하면 우리가 개입하기 어렵다”고 털어놨습니다.

 

 

◆금융기관 협력이 절실하지만, 제도 도입은 하세월

 

현재로선 경제적 학대는 예방이 최선인 만큼 전문가들은 금융기관의 협조가 절실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홍송이 동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 경제적 학대 전문위원)는 “은행원이 뭔가 이상한 인출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해자가 법적으로 정당한 대리인이거나 통장과 도장을 가져오면 인출해줘야 한다”며 “은행원에게 이를 막을 수 있는 권한을 줘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노인복지법상 신고 의무자에 은행원 같은 금융인을 포함시키고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 과태료를 물 수 있게 규정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운영 금융과행복네트워크 의장도 “어르신 계좌에서 돈 나가는 게 평소와 달라 의심이 되는 때 인출을 잠시 막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은행원이 만약 잘못 판단했더라도 선의에 따라 합리적인 주의를 기울였다면 민사상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실제 미국에서는 ‘2018년 고령자 안전법’(Senior Safe Act of 2018)을 제정해 금융회사가 고령자 금융 착취나 금융사기가 의심되는 활동을 고객 사전 동의 없이 당국에 보고하더라도 선의로 합의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등 일정 요건을 갖췄다면 민법 또는 행정 책임으로부터 면책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금융위원회도 2020년 ‘고령친화 금융환경 조성방안’을 발표하고 금융기관이 업무 중 고령자 착취 의심거래 발견 시 거래 처리 지연·거절 및 금융감독원과 경찰 등 관계 당국에 신고할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했으나, 2년이 넘은 지금까지 도입되지 않은 실정입니다.

 

지난 5월 발간된 국회 입법조사처 소보고서를 보면, 금융 착취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민·형사상 책임이 면제되더라도 직원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금융기관이 반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전문기관 설립하고 충분한 예산 줘야

 

노인 경제적 학대 예방 전문기관을 설립하고 충분한 예산을 배정하는 것도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대책입니다.

 

오영환 시니어금융교육협의회 사무총장은 “다른 유형의 노인 학대는 복지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경제적 학대는 금융 영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복지 전문가가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따라서 금융당국과 금융회사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부문이 힘을 합쳐 고령자 상대로 금융 착취 예방 교육을 하고 사례 수집, 해결 방안 제시도 할 수 있는 전문기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실제 지방자치단체가 경제적 착취 등 노인 학대 의심 사례를 발견하고 피해 노인을 보호하기 위해 공공기관, 금융기관 등과 협력해 ‘통합지원체계’를 구축·운영하는 걸 골자로 하는 노인복지법 개정안이 한준호 민주당 의원 발의로 복지위에 계류 중입니다.

 

학대 예방·피해 구제 사업에 충분한 예산을 주는 것도 숙제입니다. 생활경제지킴이 시범사업은 정부 예산 없이 민간 후원으로만 진행됐었습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6월 생활경제지킴이 파견 사업을 노인 일자리와 연계해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내년도 본사업 진행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홍 교수는 “경제적 학대와 경제적 착취는 인간으로서 경험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런 것에 공공이 예산을 투입하지 않고 민간 자원으로 사업을 한다는 건 굉장히 열악한 실태를 보여준다”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면서 “생활경제지킴이는 은행원으로 있다가 은퇴한 분들이 자원봉사 같이 나서준 건데, 경제적 학대에 대한 구제를 민간 인력으로 해야 하는 일인지 따져봐야 한다”며 “복지부와 금융위에서 예산 확보 등에 적극 나서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