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산업현장의 노동자 사망 사고 등 중대재해 감축 대책을 기존의 사후 규제·처벌 중심에서 ‘자기 규율’을 통한 사전 예방으로 전환한다. 형식적으로 운영되던 ‘위험성평가’를 단계적으로 의무화하고 안전 주체로서 사측뿐 아니라 노동자 책임도 강화한 것이 골자다. 하지만 실효성 논란이 있는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법) 개선안이 감축 방향에 담기지 않아 ‘반쪽짜리’ 대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중대재해법이 시행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대책의 방향을 전환한 것에 대해 노동계는 반발했다.
고용노동부는 30일 사후 규제와 처벌 중심에서 사전 예방으로 전환하는 내용이 담긴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노사가 함께 사업장 내 유해·위험 요인을 스스로 파악해 개선하는 위험성평가 제도를 중심으로 자기 규율 예방체계를 확립하겠다”며 “(이를 통해) 2026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의 사고사망 만인율(근로자 1만명당 산재 사고 사망자 수) 0.29?(퍼밀리아드)로 감축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규제와 처벌에 집중한 기존 방식으로는 중대재해를 줄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사고사망 만인율은 0.43?로 OECD 회원국 38개 중 34위다. 사고사망 만인율은 8년째 0.4?대를 맴돌고 있다. 중대재해 발생 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중대재해법이 시행됐지만, 법 적용 대상인 50인 이상·50억원 이상 공사 사업장의 중대재해는 되레 늘었다. 중대재해법이 적용되는 사업장에서 올해 1∼10월 발생한 사망 사고는 200건, 사망자는 224명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사고는 3건, 사망자는 17명 증가했다. 최근에도 SPL 평택공장 끼임 사고, 경기 안성 물류창고 붕괴 사고, 대전 아웃렛 화재 등 중대재해가 연달아 발생했다.
로드맵에 따라 당장 내년부터 300인 이상 대기업에서 위험성평가가 의무화된다. ‘핵심 위험 요인 발굴·개선’과 ‘재발 방지 중심’으로 위험성평가를 운영하고 2025년 5인 이상 사업장까지 단계적으로 의무화할 계획이다.
이번 대책에는 그동안 논란이 됐던 중대재해법 개선안은 담기지 않았다. 중대재해법과 관련해 노동계는 집행·처벌 강화와 적용 대상 확대를, 경영계는 모호한 기준과 과도한 처벌에 대해 개편을 요구해왔다. 이 장관은 이날 “2024년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에 법이 적용되기 전 개정하겠다”고 말했다. 고용부는 내년 상반기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중대재해법상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명확히 하는 등 개선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노동계는 기업에 대한 처벌과 감독은 완화하고 노동자의 의무는 강화한 ‘책임 전가’ 대책이라고 반발했다. 한국노총은 “재판이 평균적으로 3∼5년 정도 걸린다는 것을 가정할 때 처벌 강화로 인한 효과성을 운운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경영계가 지속해서 요구한 안전보건규제 완화 내용만 곳곳에 박혀 있다”고 비판했다.
경영계는 정책 방향이 사후 규제·처벌에서 자기 규율 예방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해 환영했다. 다만 중대재해법 개선안이 마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나타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현행법의 합리적 개선 없이 위험성평가 의무화가 도입되면 기업에 대한 ‘옥상옥’ 규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고, 한국경영자총협회도 “로드맵 세부 과제를 살펴보면 자율은 명목뿐이고 오히려 처벌과 감독을 강화해 우려를 표명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