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의 세 번째 최고 지도자였던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30일 사망했다. 향년 96세.
신화통신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국무원,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명의로 발표한 부고에서 장 전 주석은 백혈병 등으로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다 30일 낮 12시13분(현지시간) 장기 기능이 쇠약해져 응급처치했으나 별세했다고 했다.
1989년 11월 덩샤오핑이 맡고 있던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이어 1993년 3월 국가주석까지 맡으며 중국 최초로 당(黨)·정(政)·군(軍)의 모든 권력을 거머쥐었다.
톈안먼 사태라는 격동을 거쳐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한 고인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충실히 계승해 중국의 경제 도약을 일궜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유치, 홍콩(1997년)과 마카오(1999년)의 반환 등 재임 중 굵직굵직한 정치, 경제, 외교 이정표를 세웠다.
그가 주창한 공산당은 자본가, 지식인, 노동자·농민 3대 세력의 근본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3개 대표론’은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함께 2002년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 당장(黨章·당헌)에 정식으로 삽입됐다.
그는 국민 생활을 ‘원바오(溫飽·기본 의식주 해결)’ 수준에서 ‘샤오캉(小康·일상생활에 걱정이 없으며 다소 여유가 있음)’ 수준으로 한 단계 올려놓고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집권 기간 연평균 9.3%의 고속 경제 성장을 유지하며 미국과 함께 G2(주요 2개국)로 성장할 수 있게 됐다.
장 전 주석은 경제 전문가 주룽지(朱鎔基) 총리를 발탁해 계획경제 체제인 당시 금융과 국영기업 체제에 대수술도 단행했다. 다만 경제 발전하는 과정에서 빈부 갈등은 심해졌고, 동남 연안과 서북부 내륙의 격차도 벌어진 점은 비판을 받았다.
장 전 주석은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에게 공산당 총서기직을 넘기지만 최고 실권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2004년 9월에야 넘긴다. 그는 군사위 주석에 물러난 뒤에도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맥)의 원로로서 중국 정계에 깊숙이 개입했다. 하지만 장 전 주석이 격대지정(隔代指定·현 지도자가 차차기 지도자 지정)으로 지명한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집권한 후 부패척결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 당 서기와 저우융캉(周永康) 전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서기 등이 숙청됐고 상하이방은 몰락했다.
1992년 한·중 수교 중심에도 그가 자리 잡고 있다. 한·중 수교 이후인 1995년 11월 중국 최고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장 전 주석은 중국에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수행원들에게 “한국이 30년 짧은 세월 동안 발전한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장 전 주석은 양국관계를 ‘선린우호관계’에서 한 단계 높여 ‘협력 동반자관계’로 끌어올렸다.
그는 언제나 미소 띤 얼굴에 누구에게든 ‘좋다’는 칭찬을 한다 해서 ‘하오하오(好好) 선생’으로 불렸다.
중국 정부는 시진핑 국가주석을 위원장(주임위원)으로 하고 리커창(李克强) 총리, 리잔수(栗戰書) 전인대 상무위원장 등 중국 지도부 약 680명으로 구성된 장례위원회 명단을 발표했다. 장례위원회는 “이날부터 장 전 주석 추도대회 거행일까지 톈안먼, 인민대회당, 외교부, 재외공관에 조기를 게양하고, 빈소를 설치해 조문을 받는다”며 “추모 행사에 외국정부와 정당대표 등 인사들을 중국에 초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