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아메리칸 팩토리'로 오스카 받은 레이처트 감독 별세

오랜 암투병 끝에 76세 일기로 타계
페미니즘으로 시작해 '노동'에 천착
中 기업인이 세운 美 공장 심층취재
2020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상 수상

중국인이 경영하는 미국 내 공장의 현실을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2019)로 오스카상을 받은 영화감독 줄리아 레이처트가 1일(현지시간) 암 투병 끝에 7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3일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고인은 1946년 뉴저지주(州) 프린스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정육점 점원으로 일했고 가정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고인은 “나는 남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꼬마였다”며 “다른 소녀들과 인형을 갖고 노는 것이 내게는 몹시 불편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줄리아 레이처트(왼쪽)가 지난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오른쪽은 남편이자 공동 수상자인 영화감독 스티븐 보그나. AP연합뉴스

고인이 대학에 다닌 1960년대는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규탄하는 반전시위, 그리고 보수적 가치와 기득권층에 저항하는 히피(hippie)문화가 미국 전역을 휩쓸던 때였다. 고인도 자연스럽게 그 물결에 휩싸였고 영화, 그중에서도 다큐멘터리 장르를 통해 사회를 개혁하고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서 데뷔작은 ‘성장하는 여성’(1971)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고인은 당시 미국 여성들의 사회화 과정, 특히 언론 매체와 광고에 등장하는 여성의 전형적 이미지가 실제 여성들의 의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쳤다. 오늘날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영화로 꼽힌다.

 

WP는 “고인의 다큐멘터리는 냉철한 관찰, 그리고 저널리즘 못지않은 치밀한 인터뷰와 꼼꼼한 취재에 기반했다”며 “고인 특유의 스토리텔링 기법은 후세대 독립영화 제작자들한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트럼프랜드’와 ‘식코’ 등으로 유명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도 고인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인의 관심은 ‘노동’으로 옮겨갔다.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삶을 그린 ‘유니온 메이드’(1976),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삶을 추적한 ‘빨강을 본다’(1983) 등 작품에서 이런 경향이 엿보인다. 미국의 좌파 역사학자로 유명한 하워드 진(1922∼2010) 전 보스턴대 교수는 ‘유니온 메이드’를 “내가 본 노동사에 관한 최고의 영화”라고 극찬했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줄리아 레이처트(왼쪽)와 스티븐 보그나 부부가 함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2019)를 촬영할 당시의 모습. 넷플릭스 제공

1986년 첫 남편과 이혼한 고인은 얼마 뒤 같은 분야에 종사하던 스티븐 보그나와 재혼했고 그때부터 부부는 여러 다큐멘터리 작업을 공동으로 진행했다. ‘마지막 트럭 : GM 공장 폐쇄’(2008)가 대표적이다.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있던 GM 공장이 문을 닫고 24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실직하는 과정을 기록한 이 영화를 통해 부부는 세계화 시대 노동의 암울한 전망을 그렸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나 내놓은 ‘아메리칸 팩토리’는 ‘마지막 트럭’의 속편에 해당한다. 미국과 더불어 G2(주요 2개국)로 부상한 중국 기업인이 옛 GM 공장 부지에 자동차용 유리 공장을 세우고 미국 노동자들을 고용해 사업을 벌이는 내용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이 작품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제작비를 댄 것으로도 유명하다.

 

노조나 노동운동을 불허한다며 오로지 ‘근검절약’만 강조하는 중국인 경영자의 독특한 철학, 다수의 미국인 근로자와 중국 본사에서 파견된 소수의 중국인 근로자들 간에 벌어지는 문화적 충돌 등을 솔직하게 다뤄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인 2020년 고인과 보그나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한국의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최우수작품상·감독상·국제장편영화상·각본상 4관왕에 오른 바로 그 시상식이었다.

 

당시 이미 항암치료를 받고 있어 머리카락이 없었던 고인은 ‘아메리칸 팩토리’에 출연한 노동자 3명과 시상식에 동행했다. 수상 소감을 밝히며 고인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the world, unite)고 외쳤다. WP는 고인을 가리켜 “아마도 칼 마르크스를 인용한 최초의 오스카 수상자일 것”이라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