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말 국회에서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새해 예산안이 정부안보다 6147억원 깎여 통과됐다. 여야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재정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했다. 의원들의 속내는 딴판이었다. 예결위원회 조정소위원회 심사자료를 들여다봤더니 묻지 마 증액, 지역구 사업 끼워 넣기, 예산 나눠 먹기와 같은 편법과 야합이 넘쳐났다. 심지어 사찰과 교회, 이해단체, 관공서까지 챙기는 사례도 허다했다. 증액요구액이 55조원대로 예년의 15조∼20조원을 배 이상 웃돌았다. 건수는 2170건에 달했고 이 중 위헌 소지가 다분한 비목 신설도 178건이나 쏟아졌다. 의원들은 세금을 자신의 사금고로 여기는 듯했다.<세계일보 2013년 10월 1일 자 탐사보도 ‘줄줄 새는 혈세, 구멍 뚫린 감시망’>
10여년이 흘렀지만 구태와 악습은 여전하다. 올해도 예결위 의결을 건너뛰고 처리법정시한(12월2일)도 넘겼다. 여야 극소수만 참여하는 비공식·비공개예산기구인 ‘소소위’가 639조원의 예산을 주무르고 있다. 의원들은 ‘지역구 챙기기’를 위해 34조원이 넘는 예산을 밀어 넣었다고 한다. 19세기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법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소시지와 같아서 보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을 남겼는데 예산도 다르지 않다.
해마다 진통이 있었지만 올해만큼 나라 살림이 정쟁의 볼모로 잡혀 파행을 겪는 건 유례가 드물다.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책임이 크다. 상임위마다 대통령실 이전·원전산업복원과 같은 ‘윤석열표 예산’을 줄줄이 자르고 공공임대주택 등 ‘이재명표 예산’을 되살렸다. 정부안 대신 감액한 독자적인 수정안을 처리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는다. 헌법에 명시된 정부의 예산 편성권을 무력화하는 횡포가 아닐 수 없다. 거야는 ‘초부자 감세’라는 핑계로 12조원의 세금을 깎는 세제개편안도 꽁꽁 묶었다. 민주당은 애초 예산안 처리 후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를 하기로 합의했다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강행하기로 했다. 여야가 진행중인 예산안 협상도 난기류가 흐른다. 설혹 타결되더라도 예산안은 누더기로 전락할 게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