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우리] 가치와 이익 사이, 아세안으로 가는 길

‘경제 규모 5위’ 아세안 국가들
EU와 특별회담, 포괄적 협력 모색
尹정부 원칙 있는 호혜적 접근
가치·이익 결합의 파트너십 기대

베트남은 세계적인 커피 생산, 수출국이다. 베트남의 달달한 연유 커피는 한국에도 상륙하여 인기를 끌고 있다. 베트남 도심에는 수준 높은 프랑스 음식점이 많다. 이는 대항해시대의 유산이다.

프랑스(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영국(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미얀마, 브루나이)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스페인(필리핀) 등 유럽에 정복당한 동남아시아의 많은 국가는 오랜 식민통치에 시달렸다. 그리고 독립과 건국의 과정에서 이는 동남아 각국의 국가 운영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최윤정 세종연구소 인도태평양연구센터장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동남아 국가들은 유럽의 모델을 따라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을 결성하였다.



아세안에 대해서는 2022년 기준(추정치) 인구(6억7000만명)나 경제의 규모(세계 5위, 3조6000억달러) 및 성장 속도(5.1%)에 주목하여 긍정적인 평가가 있기도 하지만, 회원국 간 이질성이 높고 지정학적 충돌의 최전선에 놓여 안팎으로 분열의 역학이 작용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아세안은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는 유럽연합(EU)을 떠난 영국까지 총 11개 대화상대국과 매년 정상회의와 1000건이 넘는 장관, 실무자급 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14일 아세안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EU와 대화관계 수립 45주년을 기념하는 첫 특별 정상회담을 가졌다. 정상 선언문은 무역, 환경 및 디지털 전환 등 미래 협력을 논의하고, 아세안·EU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의지를 재확인하는 등 포괄적인 협력의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반면 EU의 관심사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규탄을 선언문에 포함시킨 것은 아세안 입장에서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EU는 노동 관련법의 개정을 앞두고 있다. 아세안과 FTA에 속도를 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 중 노동, 환경 등의 이슈가 있었다. 최초의 특별 정상회담을 개최했지만 양자 간 실질적인 협력의 성과가 나타날지는 불투명하다.

윤석열정부는 호혜성(reciprocity)을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와의 3대 협력 원칙 중 하나로 세웠다. 이는 아세안에 대해 특히 유효한 원칙이다. 아세안을 키워야 한국이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서 위험을 분산할 수 있고, 침체된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세안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호혜성만으로는 위험하다. 우리는 중국의 경험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동남아 국가들은 대부분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발전 과정에서 독재적 정부, 불공정 관행은 언제든 등장할 수 있다.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고속 성장을 거듭하였으나 오히려 강압적 독재국가로 변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경제의 발전이 민주주의를 촉진할 것이라는 희망에 근거한 자유주의 테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따라서 이는 아세안에 대한 접근이 호혜적인 동시에 가치와 원칙에 기반한 것이기도 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이번 아세안·EU 특별 정상회담에서 보듯이 가치(value)와 이익(interest)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가치와 이익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국 가치가 생명력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익이라는 자양분을 흡수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반(反)공산주의 블록으로 시작하였지만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를 받아들여 오늘날 더욱 강력한 아세안이 된 것처럼, 아세안을 대하는 우리도 가치와 이익을 융합하여 더욱 강력한 파트너십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아세안에 대한 구애가 갈수록 치열하게 전개되는 시기 우리 정부가 가치와 이익을 효과적으로 조합하여 아세안으로 가는 지름길에 오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