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역할 수 없는 누군가가 당신에게 지갑에 있는 돈 8만원을 무조건 내놔야만 한다고 윽박지른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신이 고를 수 있는 건 이 8만원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뿐이고요. 조금 고민할지 모르겠지만, 대개는 생판 모르는 남에게 주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기자가 이런 실없는 얘기를 한 건, 13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이 집행위원회·각료이사회·유럽의회 간 3자 협의를 통해 그 도입에 최종 합의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때문인데요. CBAM은 탄소가격을 충분히 지불하지 않는 나라의 제품을 EU에 수출할 경우 그 차이만큼 일종의 관세를 내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그 액수는 EU가 운영 중인 배출권거래제와 연동돼 결정됩니다. 배출권거래제는 정부가 기업에 일정량의 배출권을 할당한 뒤 기업 간에 배출권을 사고팔게 한 제도로, 이 거래 과정에서 탄소가격이 형성되도록 한 거예요.
우리나라도 그와 비슷한 배출권거래제가 있고, 당연히 거기서 탄소가격도 제시됩니다. t당 우리나라는 보통 2만원 아래(지난해 t당 배출권 평균가격 1만9709원), EU는 훨씬 높은 10만원 이상으로 형성돼 있습니다. EU는 준비기간을 거쳐 2026년부터 CBAM을 단계적으로 시행한다고 하는데요. 현재 양국 배출권 가격으로 단순 계산하면 우리나라 기업이 EU에 수출할 때 제품 생산으로 발생하는 탄소 1t당 8만원씩 지불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이건 CBAM 개념에 근거한 단순 추정일 뿐, 업종·국가별 세부 산정방식은 현재 미정입니다. 거기에 EU는 CBAM 시행으로 배출권 가격이 약 100유로(14만원 상당)까지 뛸 것이라 전망하고 있거든요.
여기서 다시 한 번 질문. 그렇다면 더 큰 액수가 될지도 모르는 이 ‘8만원’을 EU가 아닌 우리나라에 내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나라가 기업에 먼저 ‘공정한 탄소가격’을 걷으면 됩니다. 이미 지불한 탄소가격에 대해 EU가 중복해 걷어갈 명분은 없을 테니까요. EU가 가져가면 말 그대로 ‘남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꼴이지만 우리나라에 지불된 탄소가격은 기업의 탄소배출량 측정·보고·검증(MRV)이나 저감 기술 지원에 쓰여 선순환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배출권거래제를 개선해 기업들이 공정한 탄소가격을 지불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당장 국내 배출권 가격만 봐도 EU보다 80% 이상 낮은 게 이상하잖아요? 유럽 대륙에서든, 한반도에서든 배출되는 탄소에 따른 지구온난화 효과는 다르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우리 정부도 배출권거래제에 대한 ‘수술’을 예고한 상태입니다. 다른 나라에 ‘엄한 돈’ 내지 않고 나아가 탄소가격을 제대로 매겨 배출량 감축도 제대로 하려면 배출권거래제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짚어봤습니다.
◆너무 많은 ‘공짜 배출권’
“정부가 배출권을 ‘할당’한 게 아니라 기업에 ‘퍼주기’를 했다고 봐요.”
이지언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국장은 한국의 배출권거래제에 대해 이같이 말하며 “아주 ‘누더기’가 됐다”고 평했습니다. 그가 ‘퍼줬다’고 한 건 기업에 나눠준 ‘공짜 배출권’을 가리키는 건데요. 실제 지난해 시작된 제3차 배출권거래제 계획(2021∼2025년)에 따라 대상 업종 69개 중 28개는 100% 무상으로 배출권을 받았습니다. 나머지 41개 업종의 경우 딱 10%만 경매로, 나머지 90%는 마찬가지로 무상으로 줬는데요. 이러다 보니 전체 배출권 중 경매를 통한 유상할당 비중이 4%밖에 안 되는 겁니다. 배출권거래제를 안착시키기 위해 무상할당이 일정 정도 필요하겠지만 유상할당 비중이 57%인 EU와 비교하면 ‘퍼줬다’는 말이 과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EU는 남은 무상할당마저도 CBAM 도입과 함께 단계적으로 폐지하기로 했습니다. 애초에 CBAM이 해외에서 들어오는 상품에 ‘공정한 탄소가격’을 매기겠다는 건데, EU가 공짜 배출권 할당을 계속한다면 그건 ‘관세장벽’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나라가 무상할당을 줄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겁니다. 우리나라 배출권 무상할당 비중이 CBAM 도입 이후 추가로 내게 될 관세 규모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EU가 CBAM을 시작하면 우리 관세 규모를 결정짓는 요소는 크게 4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수출량, 제품 생산 시 탄소배출량, EU와 우리나라의 탄소가격 차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배출권의 무상할당 비중을 가지고 계산을 하게 될 겁니다. EU만큼 유상할당 비중을 올리지 않으면 수출기업이 추가로 물어야 할 관세가 커질 수밖에 없어요.”(플랜1.5 권경락 활동가)
배출권거래제 주무부처인 환경부도 과도한 무상할당을 손본다는 방침입니다. 내년 중 단계적인 유상할당 확대 계획을 마련하겠다는 건데요.
“두 가지를 검토하게 될 겁니다. ‘100% 무상할당 업종’을 어떻게 정하느냐와 나머지 업종은 유상할당 비중을 얼마로 잡을 거냐인데, 결론적으로는 전체 배출권 중 유상할당 비율을 단계적으로 늘려가는 형태가 될 겁니다.”(환경부 관계자)
3차 배출권거래제에선 ‘비용발생도×무역집약도’ 값이 ‘0.002’보다 크거나 같은 업종을 ‘100% 무상할당 업종’으로 정했습니다. 유상할당에 따른 산업경쟁력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업종에 편의를 봐준 거죠. 나머지 업종은 업체별 배출권 할당량 중 10%를 유상으로 할당했는데, 이 비중 또한 차차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강력한 무기’가 있는데…
그런데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배출권거래제를 고쳐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EU CBAM이 아니라는 거죠.
“EU CBAM 때문에 유상할당량을 늘릴 필요성이 높아진 건 맞지만 단지 그 효과만 가지고는 기업의 배출권거래제 참여를 설득해낼 순 없어요. 일단 EU가 CBAM을 전 품목으로 확대하겠지만 업체별로는 EU 수출량이 미미하거나 아예 없는 업체도 있을 테니까요.”(환경부 관계자)
현행 배출권거래제를 고쳐야 하는 건 그 본래 취지인 배출량 감축을 더 잘 달성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실제 유상할당을 늘리는 것만 하더라도 배출권 ‘몸값’을 올려놓을 테고, 기업 입장에서 비용 대비 효율을 따져 배출량 감축 투자를 검토하도록 만들 겁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배출권거래제는 감축 효과를 따진다면 유상할당 말고도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거든요. 각 업체에 배출권을 할당하기 전에 정부는 배출권 총수량을 정하게 되는데, 그건 결국 기업이 내뿜을 수 있는 ‘배출허용총량’을 설정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직접 감축량을 강제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정부 임의대로 그 양을 정하는 건 아닙니다. 3차 때 배출허용총량은 2018년 7월 확정된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달성을 위한 기본 로드맵’을 기준으로 산정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말 2018년 대비 40% 감축을 골자로 하는 ‘2030 NDC 상향안’이 확정됐고 그 연도·부문별 로드맵이 새로 내년 3월까지 만들어질 예정이거든요. 국가배출목표가 바뀌는 거니 3차 배출권거래제 배출허용총량을 다시 설정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겁니다. 2030 NDC 달성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계속 나오는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이번 배출허용총량 재설정이 분위기 반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배출허용총량을 2030 NDC 로드맵상 감축률보다 더 강하게 재설정해야 합니다. 배출권거래제 배출량은 국가 총배출량의 70% 정도(73.5%·3차 계획 기준)를 차지하는데, 나머지 30%는 배출권거래제의 배출허용총량과 같은 강력한 감축 수단이 없거든요. 그만큼 30%에서 미감축분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배출권거래제가 그걸 감안해 조금 더 강하게 감축 드라이브를 걸어줄 필요가 있어요.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55%를 감축하겠다는 EU도 실제 배출권거래제 감축률은 2005년 대비 61%(EU집행위 초안. 18일 합의에선 62%로 결정)로 높게 설정했거든요.”(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다만 환경부는 배출권거래제 외 배출량에 ‘믿을만한 감축 수단’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비(非)배출권거래제 부문에도 감축 수단이 작동되고 있어요. 수송은 별도의 무공해차 보급 계획이 있고 건물은 제로에너지빌딩 사업이 그 역할을 해주잖아요.”(환경부 관계자)
그런데 무공해차 보급 계획이나 제로에너지빌딩 사업이 배출허용총량만큼 강력한 수단이라 볼 수 있을까요? 배출허용총량은 사전에 배출량 자체를 묶어놓는 효과가 있지만, 무공해차나 제로에너지빌딩는 그 달성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목표’일 뿐입니다. 그러니 배출허용용량을 NDC보다 더 강하게 줄여야 한다는 지적은 다른 감축 수단의 존재를 고려하더라도 유효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환경부와 전문가 간 의견 차를 보이는 게 또 있는데 그건 바로 배출허용총량 재설정 ‘시점’입니다. 감축 측면에서는 2030 NDC 로드맵이 나오는 대로 배출허용총량을 새로 설정해 즉시 적용하는 게 바람직할 텐데 환경부는 이 또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시장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3차 계획기간이 종료된 뒤인 2026년에야 새 배출허용총량이 적용될 가능성도 있다는 겁니다.
“일단 현재 배출허용총량과 새 로드맵상 배출량 사이에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확인해야 적용 시점을 정할 수 있습니다. 이미 5년치 배출권 할당을 모두 마친 상태라 기업 입장에서는 감축 계획을 이미 짜놓은 경우도 있거든요. 배출허용총량을 계획기간 도중에 바꾸면 할당한 걸 다시 거둬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거죠.”(환경부 관계자)
그러나 계획기간 중 국가 목표가 변경되면서 환경부가 배출권을 더 나눠준 사례는 있습니다. 2016년 2020 NDC를 폐기하고 새로 2030 NDC를 확정하면서 2017년 배출허용총량이 기존보다 늘어 추가 할당이 이뤄졌거든요. 이런 전례가 있는데도 환경부는 즉각적인 배출허용총량 재설정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겁니다. 전문가들은 환경부의 그런 태도에 미심쩍은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지언 환경운동연합 국장이 전한 우려는 이런 겁니다.
“3차 계획 기간이 절반 넘게 남은 상황인데 감축률 제고를 위해 배출허용총량 재설정은 물론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다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최근 감축 정책 수립 과정을 보면 산업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모양새예요. 그러니 우리 정부가 엄격한 감축을 위해 배출권거래제를 고쳐나가기는커녕 산업부 편의만 봐주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