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영이라는 우주
함박눈이 이틀을 연이어 펑펑 내렸다. 겨울은 분명 차가운 계절인데 눈에 덮인 포근한 풍경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듯해졌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 이 마음을 함께 나누며 한 해를 마무리할 시간이 왔음을 문득 깨달았다. 바쁜 일상에 계절이 오고가는 것을 겨우 가늠하며 지내는 사이 어느덧 12월의 마지막 주를 남겨두게 된 것이다.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되새기는 것을 해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올해 기억에 남았던 일을 떠올려봤다. 인상 깊게 본 전시도 몇몇 떠올랐는데 그 가운데는 지난가을 소격동에서 만난 허수영의 개인전도 있었다.
허수영은 ‘그림 아로새기기’ 24화를 비롯해 다수 시간과 장소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작가다. 그는 일상 속 소재를 물감으로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듯 그리는 노동집약적 작업을 한다. 예를 들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새 도감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화면 위에 겹쳐 그리는 식이다. 눈앞의 풍경이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모습도 마찬가지로 그린 ‘일 년’ 연작은 작가의 대표작이다. 작가는 ‘일 년’ 연작에 집중하던 2016년 30대 중반 이러한 작업을 두고 자기가 다다르고자 하는 바를 작가 노트에서 다음 같이 밝힌 바 있다.
시 같은 풍경이었던 ‘양산동 05’는 이번 전시에서 우주가 되어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형광으로 빛나는 풀과 꽃 그리고 단풍잎이 가득 찬 화면으로였다. 작가는 그간 양산동을 방문하며 아마 반딧불이도 눈송이도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작가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도달한 적 없는 미지다. 그림이 무엇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그림이 그림을 그려 만든 아직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세계. 그는 이 과정에서 수반되는 붓질의 노동을 예술의 의미로 밝힌다. “미래에도 인간의 수공예적이고 노동집약적인 행위들이 예술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무한한 그리기를 향한 유한한 노동으로 대답하고자 한다”고. 그래서 허수영의 세계는, 예술은 급속한 과학, 기술 발달 속에도 우리가 영영 다다르지 못할 우주와 같다.
#안목의 성장
예술 또는 미술은 과학적,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도 배우기도 어려운 세계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의 구상에서 비롯한 인공지능 페인팅의 시대가 왔음에도 그렇다. 거기에는 항상 완벽한 계산과 예상을 한 치 벗어나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피천득은 ‘수필’에서 수필을 논하며 파격이라는 단어를 다음 같이 썼는데 그 파격이 예술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 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파격이 담긴 예술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꾸준히, 오래, 많이 보며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이내옥이 쓴 ‘안목의 성장’이라는 책이 있다. 30년 이상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며 자라난 자기 안목에 관해 회상하는 내용이다. 안목은 사물 또는 작품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분명 배워서 습득하기보다는 성장하여 자라나는 것이다. 10여년간 어딘가에 소속되어 전시를 기획하며 매번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전시가 있는 반면 주어져서 해내야 하는 전시도 있었다. 처음에는 주어져서 읽어내야 하는 작품이 버겁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개인적 취향에서 벗어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이 거기서 비롯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연재가 99회이자 마지막 회를 맞았다. 그간 다뤘던 100여명의 작가, 작품들은 시대, 국가, 장르를 넘나들었다. 강세황(1713∼1791),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 나혜석(1896∼1948), 알렉스 카츠(Alex Katz, 1927∼), 윤형근(1928∼2007), 카우스(Kaws, 1974∼), 이우성(1983∼)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독자의 입장에서 작가, 작품 소개의 기준이 궁금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서 이야기한 많은 작가와 작품이 그간 독자 안목의 성장에 조금이나마 보태고 더했기를 하고 바라본다. 스무살이 훌쩍 넘어 한국에 돌아왔지만 낯설었던 고미술을 꾸준히 접하며 그 귀함을 알게 된 필자처럼 말이다. 그 과정이 만약 없어 추사가 죽기 사흘 전에 썼다고 알려진 봉은사 현판 글씨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았다고 생각하면 아득하다.
좋아하는 작가만큼 좋아하는 비평가도 있는데 존 버거는 그 중심이다. ‘존 버거의 사계(The Seasons in Quincy: Four Portraits of John Berger)’(2016)는 존 버거 살아생전 모습을 틸다 스윈튼, 크리스토퍼 로스 등이 5년에 걸쳐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농민을 지지하며 그들이 생활하는 알프스 마을에서 오래 산 그의 생활 여러 면을 담아 보여준다. 영화 중간 존 버거는 오토바이 타는 법을 가르쳐 주며 말한다.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눈으로 해결책을 찾아. 그럼 문제 없을 거야.” 미술이 낯선 날이 더 많겠지만 독자분들이 시각 예술을 꾸준히 봐주시면 좋겠다. 삶의 그리고 세상의 해결책이 어쩌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안에 있어 왔다고 믿으니까.
그동안 연재를 읽어 주신 독자분들 도움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