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의 경험은 현대전에서 포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한국에서 들여온 K-9 자주포 24문이 폴란드군을 효과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폴란드 북동부 벵고제보(Węgorzewo). 수도 바르샤바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와 가까운 이곳에 마리우시 브와슈차크 국방부 장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K-9 자주포 때문이었다.
폴란드는 지난 6일 그디니아에 도착한 선박을 통해 한국에서 보낸 K-2 전차 10대와 K-9 자주포 24문을 인도받았다. K-9은 벵고제보에서 재창설중이던 제1포병여단에 배치됐다. 브와슈차크 장관의 방문은 K-9 배치를 기념하는 이벤트였다.
러시아와 인접한 곳에 K-9을 배치한 것은 그만큼 폴란드가 K-9을 중시한다는 의미다. 1000대에 이르는 K-9이 한국군에서 쓰이며 성능과 신뢰성을 입증한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산 자주포 쓰다가 국산 개발6수출까지
한국군이 자주포를 본격적으로 접한 시기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은 한국군에 M110 8인치 자주포를 제공했다. 203㎜ 곡사포를 탑재한 M110은 전술핵포탄 사용이 가능했지만, 사거리가 17㎞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에 미국산 M109 자주포를 국내 생산한 K-55 자주포를 1980년대에 전력화했지만, 고성능 자주포를 국산화할 필요성이 계속 제기됐다.
1999년 실전배치된 K-9은 이같은 소요의 결과물이다.
한국군에서 대량 운용중인 K-9은 2001년 튀르키예를 시작으로 호주, 인도, 노르웨이, 핀란드 등에 수출됐다. K-9과 더불어 K-10 탄약운반장갑차를 함께 구매한 국가도 있었다.
K-9이 세계 시장에서 호평을 받는 것은 한국군 소요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얻은 결과다.
산이 많으며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한반도에서 K-9이 성능을 발휘하려면, 다양한 환경에서의 적응력을 갖춰야 한다. 이는 사막, 평원, 혹한의 극지에서도 K-9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한국군에서 대량으로 운용하는 것도 상당한 이점이다. 규모의 경제가 충분히 확보되면서 K-9 생산비는 크게 줄어들었다. 2020년 11월에 전력화 작업이 종료된 K-9의 정부 납품가는 20여년 전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수출가격은 독일산 PZH2000의 절반 정도다.
운용 노하우를 토대로 정부 주도 성능개량이 이뤄진 것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K-9은 개발 직후 보조동력장치와 조종수 열영상 야간잠망경을 장착하고, 자동사격통제장치와 위치확인장치를 개량하는 1차 성능개량을 실시했다.
현재는 단계별 진행방식을 적용, K-9의 성능을 대폭 끌어올리는 2차 성능개량이 예정되어 있다. 블록1과 블록2로 구성된 2차 성능개량이 이뤄지면, K-9의 위력은 대폭 강화될 전망이다.
이같은 장점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무기 수요가 폭증한 폴란드의 주목을 받았다.
폴란드는 영국산 AS90 자주포 포탑과 K-9 차체를 결합한 크라프(KRAB) 155㎜ 자주포를 개발, 2015년부터 생산해 왔다. 크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우크라이나군에 제공되어 실전에 투입돼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폴란드 방위산업의 생산 능력으로는 대폭 증가한 폴란드군의 수요와 우크라이나 지원 물량을 단기간 내 충족하기가 쉽지 않았다. 브와슈차크 장관도 “폴란드 방위산업체가 (K-9과) 매우 유사한 무기를 생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의 요구 사항이 너무 컸고 짧은 시간 안에 요구 사항을 충족해야 했다”고 밝혔다.
대량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던 한국은 지난 8월 K-9 212문을 공급하는 3조2000억원 규모의 1차 실행계약 체결 이후 두 달 만에 K-9을 출하할 수 있었다. 제작사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옛 한화디펜스)는 2026년까지 폴란드에 K-9을 납품할 예정이다.
K-9을 확보한 폴란드는 큰 부담 없이 생산능력을 감안해 자국산 크라프를 발주할 수 있게 됐다. 군 전력증강과 자국 방위산업 진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사거리 연장과 유·무인 기술 적용
폴란드가 지난 7월에 한국과 맺은 K-9 도입 총괄계약 규모는 672문. 1차 이행계약분 212문을 제외한 나머지 물량은 새로운 기술이 적용되는 K-9A2를 기초로 제작될 K-9PL이 될 전망이다.
브와슈차크 장관도 지난 6일 K-9 첫 배치 기념행사에서 “한국 산업계와의 협력을 통해 장기저으로 폴란드와 한국 육군의 요구를 충족시킬 공동 프로젝트가 만들어졌다”며 “다음에 볼 것은 더 발전되고 현대적인 현대화 버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과 폴란드 포병의 미래 핵심 전력으로 자리잡을 K-9A2는 블록1과 블록2로 구분되어 만들어질 예정이다. 기술적 리스크를 낮추면서 단계적으로 개발을 진행하는 진화적 개발 방식이다.
블록1의 핵심은 포탑 자동화다. 포탄과 장약을 자동으로 장전하면 승무원을 줄이면서 발사속도를 높일 수 있다. 미국과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들도 자주포 포탑이 자동화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은 최근 포탑 자동화에 필요한 핵심기술 개발을 완료했다. 이를 통해 블록1 성능개량을 진행하면 탄약 장전과정을 자동화할 수 있다.
발사속도는 분당 6~8발에서 9~10발로 증가한다. 승무원은 5명에서 3명으로 줄어든다. 오랫동안 지적을 받아온 냉방장치 문제도 해결된다. 최대사거리는 54㎞로서 기존보다 10여㎞ 늘어난다. 포와 포탑은 전기구동방식으로 작동하며, 12.7㎜ 기관총 대신 원격사격통제체계(RCWS)가 장착된다.
블록2는 사거리 연장과 유·무인복합체계 탑재가 이뤄진다.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지난 9월 초장사정 화포체계 사거리 증대 기술 과제 사업을 시작했다. 2027년 8월까지 초장사정 화포체계와 관련된 체계 통합, 무장, 신형 탄약 기술을 개발하는 사업이다. K-9A2 블록2 관련 사업으로 풀이된다.
우선 주포는 기존보다 길이가 늘어난 58구경장 포신을 사용한다. 구경장은 포신 길이를 구경으로 나눈 결과다.
포신이 길면 포탄은 정확하게 먼 거리를 날아간다. 하지만 움직임에 제약이 있을 수 있고, 포신이 휠 수도 있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분야다.
사거리는 70~100㎞에 달할 전망이다. 기존 포탄을 개량하면 80㎞ 사거리를 달성할 수도 있으나, 사거리 100㎞를 달성하려면 활공탄이나 램제트탄 개발이 필요하다. 램제트는 대기 중 산소를 빨아들여 연료를 태우는 방식으로, 산화제가 필요치 않다.
국내에서는 풍산 등 방산업체들을 중심으로 활공탄과 램제트탄 기술 개발이 이뤄졌다. 따라서 기술적 측면에서는 사거리 100㎞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블록2의 발사속도는 블록1보다 더 빠른 분당 10발에 달한다. 궤도는 고무로 바뀐다.
유·무인 복합체계는 승무원 규모는 줄이면서 생존성은 높이는 효과가 있다. K-9 3대가 작전활동을 진행할 때, 1대는 승무원 2명이 운용하고 2대는 인공지능(AI)이 포함된 원격조정으로 기동과 사격을 할 수 있다.
3대 모두 원격조종으로 가동할 수도 있다. 병력 소요 부담이 적고 적의 포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할 위험도 낮출 수 있다.
이와 관련해 ADD는 유·무인 주행 및 포탑 무인화 기술을 확보하고자 내년부터 K-9 유·무인 핵심기술 개발에 착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K-9은 수출 시장에 출시된 국산 무기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장비로 꼽힌다. 성능과 신뢰성이 입증된 무기로서 한국군과 튀르키예군 등을 중심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 독일 등이 자주포 기술 개발에 나서는 상황에서 K-9이 기존 실적에만 의존하면 지금까지 얻은 성과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통해 K-9을 ‘괴물 자주포’로 만들고, 이를 토대로 차세대 자주포를 개발하는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