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담은 연 날리고 부침개 먹으며 새해 맞아볼까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서산 해미읍성 진남성 지나면 조선시대로 점프/낙안·고창읍성과 함께 원형 보존된 우리나라 3대 읍성/연 날리기·국궁 등 다양한 민속놀이 체험도 즐겨

 

해미읍성 연 날리기.

실타래를 조금 풀자 머리 위로 몇 차례 원을 그리던 독수리 연은 이내 맞바람을 타고 힘차게 솟아오른다. 이어 ‘I♡ 독도’와 태극기를 새긴 가오리 연에서 갈매기 연, 강아지 연까지. 서로 경쟁하듯 차례로 하늘을 나는 각양각색 연들은 겨울이라 더 투명하고 선명한 파란 하늘을 알록달록 물들인다. 그래, 2023년에는 저 연들처럼 힘차가 날아올라 보자.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해미읍성 성곽에 올라 한 해를 보내고 희망찬 새해를 맞는다.

 

해미읍성 외곽.
진남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해미읍성

 

충남 서산시 해미면 해미읍성 진남문 앞에는 칼바람에도 수문장이 한 치의 미동 없이 성문을 지킨다. 수문장 좌우로 펼쳐지는 성곽은 한눈에도 대단한 규모다. 성의 높이는 약 5m, 둘레 1800m, 성 안의 면적은 약 19만6400㎡에 이를 정도로 광활하다. 해미읍성이 순천 낙안읍성, 고창읍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읍성으로 꼽히는 이유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잘 보존된 몇 안 되는 평지성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조선 제3대 태종대왕이 1416년 군사를 이끌고 도비산에 올라 서산태안지방의 지형을 본 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해미로 옮기도록 결정한다. 1417년(태종 17년)부터 1421년(세종 3년) 사이에 축성됐고 1491년(성종 22년)에 완성됐다. 1652년(효종 3년)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년 동안 종2품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는 충청도의 군사중심지 역할을 하며 국방은 물론, 내란 방지 등의 임무도 맡았다. 이순신 장군의 흔적도 만난다. 1579년 장군이 무과에 급제한 후 세 번째 관직을 받아 이곳에서 충청병마절도사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했다.

 

공주.
청주.

자세히 보니 진남문 주변 성벽 돌에는 ‘淸州(청주)’ ‘公州(공주)’ 등 한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성을 쌓을 때 여러 마을에서 인력이 동원됐는데 마을마다 공사 구간을 정한 흔적이란다. 적군의 접근을 어렵게 하려고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성 주변에 둘러 심었기 때문에 ‘탱자성’으로도 불렸다. 수문장과 기념사진 한 장 찍고 진남문을 통과하면 순식간에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날아간다. 상가들이 빼곡한 성밖의 도심 풍경과는 전혀 다른 과거로의 시간들이 펼쳐지기 때문.

 

포졸 조형물.
방.
해미읍성 성벽.

삼지창을 들고 눈을 부라리는 포졸 뒤로 천자총통 등 다양한 무기가 전시됐다. ‘방(榜)’에는 해미현감 명의로 2명의 ‘용모파기’가 걸려 웃음을 자아낸다. ‘부녀자를 폭행하고 재물을 약탈한 자로 키는 육척에 눈썹이 진하고 오른쪽 눈 아래 칼 등에 의한 흉터가 있고 얼굴은 하얗다. 신고자에게 포상으로 삼냥을 준다’는 내용이 적혔다.

 

해미읍성 성벽.
해미읍성 산책로.

원래 해미읍성에는 동·서·남 3대문과 옹성 2곳, 객사 2동, 포루 2동, 동헌 1동, 총안 380개곳, 수상각 1곳, 신당원 1곳이 설치될 정도로 매우 규모가 컸다. 세월이 흘러 해미초등학교, 우체국, 민가 등이 들어서 읍성은 사라졌지만 다행히 1973년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돼 옛 모습을 일부 되찾았다. 현재 3대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가 복원됐다. 시원하게 펼쳐진 잔디 마당 주변으로 동헌, 객사, 내아, 옥사, 민속 가옥이 늘어섰다. 해미읍성역사보존회에서 운영하는 전통 주막, 카페, 기념품점, 연 판매소도 설치돼 볼거리가 많다. 주막에서는 불판에서 지글지글거리며 부침개가 익어가는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도토리묵 등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고 지역 양조장의 막걸리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읍성을 거닐다 보면 투호, 고리던지기, 제기차기, 굴렁쇠 등 다양한 민속놀이와 연날리기, 국궁 등을 체험할 수 있다.

해미순교성지.
교황 프란치스코 동상.
 

◆천주교 박해 역사를 간직한 해미순교성지

 

진남문 근처 탱자성 사랑방 카페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드신 신 키스링 마늘빵을 판매한다는 안내문이 내걸렸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읍성을 방문했을 때 교황 간식 식탁에 오른 빵으로 서산 6쪽 마늘로 만들었다. 교황이 해미읍성을 다녀간 이유가 있다. 지금은 한없이 평화롭지만 천주교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는 곳이다. 1866∼1872년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지에서 신자가 끌려와 이곳에서 처형됐는데 무려 1000명이 넘는다. 해미읍성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수감됐던 옥사터와 나뭇가지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하며 처참한 죽음을 맞던 노거수 회화나무가 같은 자리에 서 있어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전한다. 당시 나뭇가지에 철사로 신자들의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거나 교수형에 처했다. 나무에는 철사가 박혀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해미순교성지.
해미순교성지 기념관.
 

해미읍성 인근 해미순교성지는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더욱 생생하게 전한다. 신자 1000여명이 묻힌 곳으로 사약, 몰매, 교수형, 참수형, 동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됐고 심지어 산 채로 땅에 묻는 생매장과 물에 빠뜨리는 수장형까지 자행됐다. 해미읍성 회화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던 신도들을 돌 위에 태질해 살해했던 순교 자리개돌도 남아있다.

 

여숫골 표지석.
해미순교탑.

대부문 무명 순교자로 현재까지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는 132명이고 이 중 3명이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때 사복됐다. 이곳은 ‘여숫골’로도 불렸다. 순교자들은 죽음을 앞두고 “예수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했는데 주민들이 이를 “예수머리”로 알아들어 여숫골로 부르게 됐단다. 해미천 옆에는 무명 순교자의 넋을 기리는 높이 16m 순교탑이 서 있어 경건함을 더한다. 교황청은 18~19세기 천주교 박해과정에서 희생된 무명 순교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20년 11월 해미순교성지를 국제성지로 지정해 2021년 3월 최종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