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작은 것 보듬는… ‘따뜻한 모성’을 꿈꾸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아시아 여성주의 버팀목’ 윤석남 작가
불혹에 작품 시작… 국내외 활동 활발
내밀하고 수수한 이야기 공감대 형성

‘메마른…’ 현실 살피는 예술가 역할 담고
‘내 팔이 10㎝ 모자라…’ ‘눈물 한 대접…’
이타적이고 따뜻한 마음 화폭에 옮겨

“여성주의? 연약한 존재 보살피는 것
여자가 아니라도 가질 수 있는 마음”

#세상 모든 연약한 존재 보듬는 마음, 모성

소녀가 창문에 바짝 기대어 팔을 뻗는다. 무엇에 그토록 가닿고 싶었던지 팔이 키보다 기다랗게 늘어났다. 땅 위에는 빨간 꽃 한 송이 고개 숙인 채 시들어 간다. 마른 꽃잎 위로 쥐어온 물 한 줌이 눈물처럼 떨구어진다. ‘내 손이 10㎝ 모자라 저 꽃이 시든다. 꿈이라면 좋겠다.’ 연필로 또박또박 새긴 글귀가 마음을 울린다. 이름 모를 작은 꽃이 시드는 것은 그의 탓이 아닌데, 보듬지 못한 손끝이 미안하여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작고 약할수록 모성은 거대해진다.

윤석남 ‘눈물 한 대접 받아 놓고’(2009). 학고재 제공
‘내 팔이 10㎝ 모자라 저 꽃이 시든다 꿈이라면 좋겠다’(2014). 학고재 제공

아시아 여성주의의 버팀목으로 불리는 작가 윤석남(84)의 그림이다. 마흔셋 나이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동시대 미술계에 단단히 자리매김했다. 어머니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주목받았고, 여성 작가 최초로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다. 런던 테이트 미술관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 등 해외 유수 기관이 연 기획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2019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제23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올해 대구미술관에서 개인전 개최를 앞두고 있다.



윤석남의 작품세계는 내밀하고 소박한 이야기가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여정을 잘 보여준다. 작은 생각이 쌓여 의미가 되고, 언어가 되어 낯선 이 마음과 공명하는 예술로서 거듭나는 것이다. 그의 작업 방식이 꼭 그랬다. 작업실에 혼자 머무는 시간마다 수없이 많은 그림을 그렸다. 선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작가이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서. 자리 한편에 그 이야기들이 두텁게 쌓였다. 작은 그림들은 때를 만나면 회화가 되고, 조각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윤석남은 허난설헌과 이매창 등 역사 속 여성 서사를 다루거나 여성 독립운동가 삶을 재조명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인다. 강하고 이타적인 사랑의 힘으로 이로운 세상을 끌어낸 여성들이다. 위태로운 시대를 품어 온 어머니의 힘. 연약하고 가엾은 것들을 위해 누구보다 강인해지는 그 사랑은 시든 꽃을 위해 팔을 늘어뜨린 소녀 마음과도 다르지 않다. 작은 손에 담아온 한 줌의 물이 이미 커다란 모성의 실천이다. 작가는 그로부터 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나아가 어머니의 어머니, 아이의 아이들에 대하여 생각했겠다. 두 뼘 남짓한 종이 위에서 위대한 모성을 꿈꾸는 일이다.

#예술가의 방식으로, 메마른 땅에 물을 주고

또 하나의 그림 속에 가느다란 줄을 붙들고 매달린 사람이 보인다. 몸이 알처럼 둥근 형상 안에 담긴 모습이다. 포근한 알껍데기는 여린 속내를 보호하는 고치이자 오롯한 안식처이다. 때로는 마른 땅에 물 길어 나르는 물주머니가 되기도 한다. 풍선처럼 부푼 색색의 몸이 한가득 수분을 머금어 왔다. 똑똑 내려보낸 물기가 밴 듯 땅 위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생겨났다. 그 밑에 정갈한 글씨로 새겨 두었다. ‘메마른 땅에 물을 주고.’

‘메마른 땅에 물을 주고’(2002). 학고재 제공

윤석남이 말하길 예술가란 지상으로부터 20㎝ 정도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더 멀리 떠오르면 자세히 볼 수 없고, 지나치게 현실에 파묻히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이라고. 2014년 서경식 교수의 평론에 쓰인 말이다. 윤석남은 그네 같은 줄을 타고 공중에 뜬 사람을 자주 그렸다. 그림의 아래쪽 가장자리로부터 꼭 그만큼 떠오른 모습이다. 이보다 멀리 떠나가면 지상의 일들을 잊게 된다. 이보다 가까이 발 디디면, 꽃과 함께 하릴없이 시들어갈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도움닫기 하여 땅으로부터 멀어지고, 종종 되돌아와 꽃피우는 사람들. 그네에 올라탄 이들은 언제나 지상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서 땅을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현실의 삶으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결코 외면하지 않으며 직시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그래야 한다. 구름 좇으며 꿈꾸다가도 눈에 밟히는 지상의 일들을 위하여 붓을 들어야 한다.

메마른 땅에 물 주는 사람은 나름의 방식대로 현실을 보살피는 예술가의 모습을 닮았다. 우리가 발 디딘 날들에 수분을 더하는 작은 시도다. 각박한 현실을 조금 더 비옥하게 만드는 노력인 것이다. 그 애틋한 노력이 당장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 해도 의미 있다. 저 물웅덩이가 땅에 거듭 스미면 언젠가 강인한 물길이 되어 더욱 튼튼한 꽃을 피워낼 수 있을 테니까.

#눈물 가득 머금은 어머니의 심장

제주현대미술관 전시장 한편에 빛나는 심장이 둥실 떠올랐다. 표면에는 투명한 물방울이 여럿 맺혔다. 윤석남의 조각 작품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2015)다. 해당 작품은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과 제주돌문화공원에서 개최한 개인전 이후 일곱 해 만에 제주에 왔다. 박남희(53) 예술감독이 이끄는 제3회 제주비엔날레 ‘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Flowing Moon, Embracing Land)’에 선보이기 위해서다.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김만덕(1739∼1812)은 조선 후기 제주 거상이자 자선사업가다. 열두 살에 부모를 잃고 기생에게 몸종으로 의탁했으며 자신 역시 한동안 기생의 삶을 살았다. 전직 기생이자 독신 여성이던 김만덕은 조선 사회에서 낮은 신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다른 수완으로 객주를 운영하며 부를 쌓기 시작했다. 정조시대 제주에 큰 기근이 들자 김만덕은 선뜻 전 재산을 털어 육지로부터 쌀 오백 섬을 구해 왔다. 당대 여성으로서 뭇 남성보다 뛰어나게 많은 쌀을 쾌척하여 굶주린 도민들을 살려냈기에 세상이 감동하였다. 김만덕은 임금 부름을 받아 금강산에 발 디딘 첫 제주 여성이 됐다. 조선 사대부들이 그의 공로에 감격하여 시와 글을 헌사하기도 했다. 시대가 자신을 하대하여도 개의치 않는 강인함으로, 김만덕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2015). 제주비엔날레 제공

윤석남은 김만덕의 심장을 여러 차례 그렸다. 그중 2009년의 화면 가득 자리 잡은 선홍빛 심장이 인상적이다. 맑고 커다란 물방울을 뿜어내는 심장 아래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 아담한 찻상에 물그릇 하나 올려둔 채 눈 감고 합장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주위에 눌러쓴 글귀는 이렇다. ‘김만덕은 누구일까? 붉은 핏방울이 아니다. 맑은 눈물이다. 배고픈 이들을 위한 그이의 슬픔. 눈물 한 대접 받아 놓고.’

일찍이 혼자가 되어 어려운 날들을 견뎌낸 김만덕은 훗날 자신이 모은 재산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조금 더 편안한 삶을 누리고도 싶었을 것이다. 피땀 흘려 부를 쌓은 스스로가 기특하여 넉넉한 보상을 줄 수도 있었을 터다. 그러나 그는 남을 구했다. 자신을 쉬이 여기던 사람들이 배곯을 때 곳간을 열어 쌀을 베푸는 온화한 마음. 윤석남이 김만덕의 심장을 빚은 것은 그 때문이다. 물기 가득 머금고 부푼 심장은 곧 남의 아픔이 측은하여 눈물 차오른 어머니의 얼굴인 것이다. 언제나 원망보다 안타까움이 앞서, 가진 것 다 내주고도 아끼지 않는 헌신의 이름이 모성이다.

#더 비옥한 오늘을 위하여, 물기 어린 마음으로…

마음속 정화수 한 그릇 떠다 놓고 마주한 새해를 다짐해 본다. 그런 물기 어린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더 사랑하고, 아끼고, 끌어안으며 내게 주어진 작은 땅을 가꾸어 보자고. 몇 해 전 모성이 무어냐고 묻자 윤석남이 말해 주었다.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는 타인을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것이에요. 내가 약한 여성이기 때문에 더 큰 모성을 발휘하는 것. 나보다 연약한 것들을 보살피는 것. 사랑의 대상이 내 아이가 아니라도, 또 자신이 반드시 여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마음이지….”

세상이 유난히 아픈 요즈음 주위를 돌아보아야 하겠다. 미처 볕 들지 않는 곳 없는지, 혹시 외로운 자리는 없는지. 다정한 몸짓 하나가 우리의 세상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소녀가 담아온 손끝의 물방울처럼, 무척 사소하더라도 괜찮다.

 

※새해를 맞아 젊은 큐레이터 박미란씨가 ‘속닥이는 그림들’과 ‘오프 더 캔버스’를 선보입니다. ‘속닥이는 그림들’은 저마다의 언어로, 속닥이는 그림들을 통해 우리 동시대 미술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프 더 캔버스’는 작품과 세상의 만남, 그 주위에서 펼쳐진 이야기, 캔버스 바깥의 사람들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새 연재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