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정부 들어서도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 관행이 근절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기업 사장은 물론 비상임이사까지 전문성이 의심되는 인사들이 대거 임명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출범 이후 임명된 공기업 비상임이사 10명 중 4명 이상이 직무 관련성이 없는 인사로 채워졌다. 정부는 공공기관 개혁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공기업 이사회 운영의 한 축인 비상임이사 자리까지 ‘낙하산’을 내리꽂고 있는 셈이다.
공공기관 기관장 자리에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캠프에 몸담았던 인물들이 여럿 차지하면서 낙하산 논란이 있었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한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 최연혜 한국가스공사 사장, 정용기 한국지역난방공사 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낙하산 인사를 원천차단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현실은 공기업 기관장은 물론 비상임이사 자리까지 정치권의 ‘나눠먹기’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8일 세계일보가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를 통해 36개 공기업의 임원 현황을 살펴본 결과,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임명된 비상임이사 47명 가운데 20명(42.5%)의 직무 관련성이 불분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36개 공기업 중 12곳에서 낙하산으로 의심될 만한 비상임이사들이 임용돼 3곳 중 1곳꼴로 석연찮은 인사가 이뤄진 것으로 파악됐다.
우선 에너지 관련 공기업에서 낙하산으로 의심될 만한 인사가 여러 차례 드러났다.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에서 지난해 9월 비상임이사로 임명된 A씨의 경우 2010년부터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을 거쳐 경북에서 3선 의원을 지낸 여권 인사로,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김천시장 경선에서 탈락했다. 전력기술 관련 업무 이력은 없었다. 국내 최대 에너지 공기업인 한국전력도 지난해 8월 B씨를 비상임이사로 임명했다. 제5·6대 전남 나주시의회 의원을 지낸 B 이사는 국민의힘 나주시·화순군 당협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역시 정치 경력 외에 전력 관련 업무를 하지 않았다. 한국동서발전이 지난해 11월 임명한 C 비상임이사는 전 국회 사무처 정책연구위원, 이명박정부 시절 정무비서관을 지낸 여권 인사로 분류된다. 중요 경력 사항에 에너지 관련 직책은 없다.
지난해 11월 초 임명된 비상임이사가 모텔 운영, 자유한국당 당원협의회 경력이 알려진 후 자진사퇴하며 홍역을 앓았던 한국수력원자력에서도 낙하산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말 비상임이사에 임명된 D씨 등 3명의 직무 관련성이 불분명한 상태다. 이들 중에는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소속으로 경북 상주시장 예비후보에 출마했다 낙선했거나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새누리당) 비서실장을 지낸 정치권 인사가 포함됐다. 에너지 공기업에 임명된 비상임이사들은 주로 해당 공기업 본사가 있는 지역구에서 활동한 범여권 인사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에서도 낙하산 인사 의혹이 제기됐다. 더불어민주당 정일영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비상임이사로 임명된 E씨의 경우 여당 서울시 의회의원, 여당 국회의원 보좌관 등을 지냈을 뿐 석유공사에 대한 전문성은 없었다. E씨는 낙하산 인사 의혹이 제기된 최연혜 한국가스공사 사장의 의원 시절 4년 동안 보좌관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아울러 여수광양항만공사에서는 박근혜정부 당시 대통령경호실 차장을 지냈던 인물이, 해양환경공단에는 충남포커스 서북지역본부장으로 ‘새누리당을 사모하는 모임’ 충남본부장을 역임한 친여 성향 인물이 각각 지난해 10월과 11월에 임기를 시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지난달 주택도시보증공사에서 비상임이사로 임명된 F씨의 경우 새누리당 소속으로 서울 은평에서 19·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 낙선했던 이력이 있고, 지난 대선에서는 윤석열 캠프 정책메시지실장을 맡기도 했다.
◆금융권과 문화예술계에서도 논란 지속
금융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윤석열 캠프 출신의 관료가 금융지주 최고경영자(CEO)가 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달 12일 NH농협금융 임원후보추천위원회는 이석준(사진) 전 국무조정실장을 NH농협금융지주 회장으로 낙점했다. 당시 금융권에서는 손병환 전 회장의 연임 가능성을 크게 봤는데 이 같은 결정에 의외라는 반응이 나왔다. 손 전 회장이 1962년생으로 경쟁 금융지주 회장보다 젊은 데다 이전의 여러 농협금융 회장 임기가 2년 재직 후 1년을 더 맡는 ‘2+1년’이었기 때문이다. 농협금융이 지난해 3분기까지 사상 최대 실적을 낸 점도 손 회장의 연임 관측에 힘을 보탰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서 다른 금융사에도 전직 관료 등 ‘올드보이’들이 낙하산 인사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자녀 관련 특혜 의혹을 받는 김지완 BNK금융지주 회장은 임기 만료를 5개월 앞두고 지난달 사퇴했는데, 차기 회장으로 이팔성 전 우리금융 회장 등 외부 출신 인사가 거론된다.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 고위직 인사에서도 비슷한 낙하산 논란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지난해 9월 임명된 백현주 국악방송 사장이다.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백 사장을 임명했을 때 국악계 내부에서는 ‘누군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는 평이다. 전임 사장들과 달리 백 사장은 국악 쪽 전문성이나 활동 이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연예부 기자 및 방송인 출신인 백 사장은 2020년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인사로 영입된 뒤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후보로 나섰다. 이어 지난해 대선 당시 윤석열 캠프에 합류했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사회복지문화분과 전문위원을 맡았다.
문체부 산하 문화·관광·콘텐츠 분야 유일의 정책연구기관인 한국문화관광연구원도 윤석열 캠프에서 활동했던 김세원 원장이 이끌고 있다. 기자 출신으로 가톨릭대 영어영문학부 조교수를 한 김 원장은 문화·관광분야 경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영상자료원도 충북 괴산군 의원과 도의원을 지낸 오용식 국민의힘 충북동남4군조직위원장을 비상임감사에 임명해 논란이 일었다. 한 문화예술계 인사는 “공공기관 고위직에 낙하산 인사를 앉히는 게 아무리 관행이라고 하지만 전문성이 떨어지거나 관련 업무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중책을 맡기는 건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공공기관 개혁은 말뿐… 깜깜이 낙하산 인사 관행 여전
낙하산 관행이 근절되지 않는 건 임명 제도에 허술한 점이 있고, 공공기관이 이를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에 따르면 공기업 기관장은 ‘각 기관이 꾸린 임원추천위원회의 추천→공공기관운영위원회(공운위) 심의·의결→주무기관의 장 제청→대통령 임명’의 과정을 거치도록 돼 있다. 비상임이사는 ‘임추위 추천→공운위 심의·의결→기획재정부 장관 임명’을 통해 뽑힌다. 외형적으로는 낙하산 인사를 거를 단계가 이중·삼중으로 마련돼 있는 셈이다.
하지만 기관장과 이사의 자격요건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다르다. 공운법상 △업무에 관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하고 최고경영자의 능력을 갖춘 사람 △업무 수행에 필요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하고 능력을 갖춘 사람 정도로만 돼 있다. 각 공공기관 역시 임원후보자 심사 기준을 포괄적으로 규정한 곳이 많다. 아울러 기재부 장관이 위원장으로 있는 공운위는 임원 인사와 관련한 내용의 경우 “개인의 신상, 평판 등 개인정보에 관한 사항”이란 이유로 회의록에서 비공개 처리하고 있다.
이 같은 낙하산 인사는 공공기관 개혁이 예고된 시점에도 여전한 것으로 드러나 더욱 문제다. 기재부는 공공기관 부채규모가 2016년 말 499조4000억원에서 2021년 말 583조원으로 84조원 확대되고, 공기업 영업이익도 2017년 13조5000억원에서 2021년 7000억원으로 쪼그라드는 등 공공기관 방만경영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판단, 생산성 제고 등 3대 혁신과제를 추진키로 한 상황이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공공기관 대상 정부지원 규모는 정부 예산안 기준 112조4000억원에 달한다.
전문성 없는 비상임이사를 임명한 공기업은 “지역과 소통하는 데 도움이 돼서”(한국전력기술·한수원·해양환경공단), “외부기관 협력 체계가 필요해서”(주택도시보증공사·석유공사), “다양한 의견을 참고하기 위해”(여수광양항만공사·동서발전)라고 답했다. 하지만 비상임이사 등이 공공기관 경영목표 설정 등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낙하산 인사 관행은 공공기관의 효율적 운용을 저해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국장은 “임원추천 관련 규정이 없지 않지만 끼워 맞추기 식으로 제도가 운영되면서 ‘보은성’ 자기 사람 챙기기 관행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면서 “현 정부가 공공기관 개혁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배구조 관련해서는 개혁 방안이 보이지 않아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