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수도권 빌라·오피스텔 1139채를 갖고 있다가 숨진 ‘빌라왕’, 인천 일대에서 30여년간 건축업을 하며 2700여채의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건축왕’, 수도권 일대에서 빌라·아파트 3493채를 매입해 임대업을 해온 ‘빌라의 신’ 등 갭투기로 보유한 주택으로 세입자들을 등친 전세사기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13일 ‘무자본 갭투기’로 다세대 주택 600여채를 무더기로 사들여 전세 보증금을 빼앗은 일당 78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2017년 7월부터 2020년 9월까지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 인천 등 수도권 일대에서 임차인 37명을 속여 전세 보증금을 편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 중 지난해 제주에서 숨진 빌라 임대업자 정모씨의 배후로 지목된 부동산 컨설팅업체 대표 신모씨와 또 다른 임대업자 김모씨 2명은 구속됐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신씨는 건축주 등 건물 소유자에게 매수인을 연결해주는 부동산 컨설팅업체를 차리고 김씨와 공모해 신축 빌라 등 다세대 주택 628채를 모두 김씨 명의로 매수했다. 경찰은 둘의 계좌 내역을 분석해 이 과정에 참여한 전세 컨설팅업체 관계자, 분양업자 등 76명을 추가 검거했다. 이들이 매도인에게 분양·컨설팅 대가로 받은 수수료 명목의 불법 수익은 8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세사기 의심 고소 사건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경찰은 지난해 7월부터 특별 단속을 벌이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관계기관, 지자체 등과 함께 전담 조직을 구성해 전세사기 대응 종합대책을 마련 중이다.
경찰, 국토부, 부동산 업계 관계자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전세사기 사건의 3대 키워드는 ‘수도권’에 거주하는 ‘20·30대’의 ‘빌라’(연립·다세대주택) 전세 매물을 꼽을 수 있다. 전세보증금을 날린 사회초년생, 1인 가구, 신혼부부 등이 일순간에 주거 취약계층으로 내몰리게 된다는 점에서 범정부 차원의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직장인 A(30)씨는 2021년 7월 인천 부평구의 한 빌라를 전세보증금 2억원에 계약했다. 전세대출 이자로 매달 60만원 가까운 액수가 빠져 나가고 있고, 몇 달 뒤면 대출 만기가 돌아오는데 보증금을 돌려받을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집주인은 지난해 말 문자메시지로 “빌라가 경매에 넘어갈 예정이니, 직접 돈을 더 내고 매입하든 새 집주인과 얘기해달라”고 통보했다. A씨는 같은 집주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온라인 세입자 모임에 들어간 뒤에야 집주인과 공인중개사가 한 패였다는 것을 알았다. 집주인의 친척인 중개업자는 A씨처럼 원룸이나 오피스텔을 계약하려고 온 고객들에게 시세보다 저렴한 빌라로 소개하며 계약을 유도했던 것이다. A씨는 “중개업소는 이미 폐업했고, 다른 피해자들이 단체채팅방을 만들어 경찰에 신고한 뒤였다”며 “경매는 최소 1∼2년씩 걸린다고 하고, 절차가 끝나도 보증금을 일부만 돌려받았다는 피해자들이 많은데 전세대출은 2∼8개월만 연장할 수 있어 마음이 무겁다”고 토로했다.
서울에 사는 20대 직장인 B씨는 최근 신혼집을 구하려다가 전세사기를 당할 뻔한 사례를 부동산 커뮤니티에 소개했다. B씨는 올해 여자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경기 지역 신도시의 아파트를 구매하기로 했다. B씨가 만난 중개업자는 먼저 상대적으로 시세는 높고 주거 환경은 낙후된 아파트를 보여줬다. B씨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중개업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파트 대신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신축 빌라 전세를 구할 수 있다”며 빌라를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B씨가 중개업자와 함께 방문한 빌라는 입구 공사 등이 마무리되지 않았는데도, 대부분의 집 현관에 ‘계약 완료’라는 종이가 붙어있고 사람이 사는 것처럼 택배상자도 여럿 놓여 있었다. B씨는 “당일에 가계약금 100만원만 걸고 계약서를 쓰면 전세보증금 1000만원을 깎아주고 이사비용 100만원을 현금으로 넣어준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유혹하려는 느낌이 들었다”며 “알고 보니 인근 신축 빌라의 매매가격 수준으로 보증금을 높여 부른 ‘깡통전세’였다”고 말했다.
국토부는 지난해 9월 이후 전세피해지원센터에 접수된 피해 사례 687건에 대한 분류 심사를 거쳐 106건을 경찰청에 수사 의뢰했다. A·B씨의 사례처럼 수도권에 거주하는 2030세대가 전세사기 범죄의 주요 타깃이 됐다. 경찰청에 넘긴 106건 중 피해자가 30대인 경우는 50.9%, 20대는 17.9%로 조사됐다. 피해자 10명 중 7명은 20·30대인 셈이다. 피해 지역은 서울 52.8%, 인천 34.9%, 경기 11.3%로 집계됐다.
20·30대 청년층이 전세사기 범죄의 희생양이 된 것은 상대적으로 부동산 계약 경험이 적은 젊은층이 범행 대상으로 선호되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사기 집단은 이들이 부동산 가격에 민감하다는 것을 간파해 자금 여력이 없어 보이는 피해자들에게 은밀한 제안을 한다. 경찰, 국토부 등의 조사 결과, 일부 피의자들은 호의를 베푸는 척하며 ‘청년 특별이자지원’, ‘1인 가구 보증금 인하’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전세 계약을 유도했다. 다단계나 피라미드 조직처럼 젊은층을 고용해 세입자를 모집해오면 건당 리베이트를 주기도 했다.
전세사기의 매물은 수도권의 빌라가 대부분이다. 빌라는 아파트보다 가격이 저렴해 젊은층의 구입 문턱이 낮고, 시세 정보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아파트는 국토부와 한국부동산원 등을 통해 실거래가 통계를 확인할 수 있고, 민간 부동산 플랫폼을 통해 호가 변동상황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반면 빌라는 시세를 집계하는 곳이 많지 않고, 세대 규모가 크지 않은 만큼 인위적으로 호가를 띄우기도 쉬운 편이다.
전세사기 피의자들은 시세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수요는 꾸준히 몰리는 수도권 지역에서 세입자를 모집하며 계속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 집중관리 다주택 채무자(악성 임대인) 통계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강서구 화곡동(736건), 인천에서는 부평구 부평동(189건)에서 전세금을 떼어먹은 사례가 많았다. 이들 지역은 전세 수요가 꾸준하게 받쳐주는 구도심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신축 아파트의 물량은 수요에 비해 아주 적은 편인데, 미개발 지역의 토지 가격은 아직 높지 않아서 갭 투기를 이용하면 무자본으로 신축 빌라를 무한정 사들일 수 있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장은 “시세를 찾기 어려운 빌라를 이용해 세입자한테 높은 전세금을 받고, 다시 그 돈으로 빌라를 짓거나 사서 피해자를 모집하는 구조”라며 “20∼30대 사회초년생이 전세사기에 가장 취약해서 꾸준히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위한 긴급 대책을 준비 중이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보험 가입자에 대해서는 사전심사제를 도입해 보증금 지급 기간을 최대한 단축할 계획이다. 전세자금대출 만기 연장과 저리 대출도 지원한다. 보증에 가입하지 못했거나 보증금 지급이 늦어질 경우 가구당 최대 1억6000만원을 연 1%대 이율로 대출받을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전세사기 근절을 위한 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상영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3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과 달리 빌라와 오피스텔 등은 HUG의 보증 대상이 아니라 관리가 안 되고 있다”면서 “이 영역을 제도화해주지 않으면 앞으로 (전세사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조주현 건국대 부동산학과 명예교수는 “정부가 다주택자를 규제하자 음지로 숨어들어가면서 보증보험이 활성화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며 “집주인과 세입자 간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하고, 부동산 임대업이 투명하게 관리되도록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