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질병 괴담에 헌혈도 거리두기… 중환자들 피 마른다 [이슈 속으로]

‘혈액 보릿고개’ 현상 심화

지난 2022년 헌혈 건수, 2018년 대비 8.8%↓
개인 헌혈 급감… 혈액 보유 4.5일분 그쳐
수혈 노년층 증가도 혈액난 가중 한몫
백혈병 환자 등 지정 헌혈자 찾기 진땀

HIV 감염 등 온라인 중심 헛소문 증식
한적 “무균 처리된 일회용 제품만 사용
환자 생명 위협받지 않게 적극 동참을”

안동 헌혈의집 직원이 봉사자 김모(31)씨를 불렀다. “여기 헌혈 캠페인 홍보물입니다.” 김씨는 직원에게 건네받은 홍보물을 챙겨 거리로 나왔다. “혈액이 부족해요.” “소중한 생명을 살립시다.” 김씨의 외침에 대답 없는 메아리만 돌아왔다. 대부분의 행인은 곁눈질을 한 번 하고 제 갈 길을 갔다.

“감기 증상이 있다” “미용실 예약에 늦었다”는 이유를 들며 이들은 김씨의 헌혈 제안을 거절했다. 행여 붙잡기라도 할까 발걸음을 틀기도 했다. 김씨가 홍보물을 건네자 손사래를 치며 “폐지를 왜 나눠주냐”고 소리치는 행인도 있었다.



결국 김씨가 거리로 나선 1시간 동안 헌혈의집으로 향한 사람은 ‘0명’. 헌혈에 동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현정(40) 간호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헌혈이 줄고 있다”며 “겨울철에는 활동량이 줄고 대학교 방학과 같이 혈액 수급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많아 헌혈자가 더 줄어든다”고 말했다.

‘헌혈 보릿고개’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혈액 확보에 빨간불이 켜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개인주의 확산에 헌혈 과정에서 질병이 옮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까지 퍼지면서 헌혈을 향한 부정적 선입견이 크다.

혈액은 수혈이 필요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아직 대체할 물질이 없고, 인공적으로 만들 수도 없다. 여기에 혈액은 장기간 보관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적정 혈액 보유량을 유지하기 위해선 지속적이고 꾸준한 헌혈이 필요하다. 국내 헌혈 부족의 문제점과 잘못된 인식 등을 짚어본다.

◆헌혈 줄감소… 개인 참여 미미

20일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따르면 지난 1일 7.7일분에 달했던 혈액 보유량은 17일 4.5일분까지 떨어졌다. 혈액 보유량은 5일분 미만은 ‘관심’, 3일분 미만은 ‘주의’, 2일분 미만은 ‘경계’, 1일분 미만은 ‘심각’ 단계로 나뉜다. 매일 5500여명 이상이 헌혈에 참여해야 하는데, 현재는 1000여명 정도 부족하다.

국내 혈액 공급량 역시 매년 감소 추세다. 지난해 헌혈 건수는 264만9007건으로 2018년(288만3270건) 대비 8.8% 감소했다. 2021년 혈액 제제 생산량과 혈액 공급도 2019년 대비 각각 4.5%, 5% 줄었다. 인구 고령화가 심화하면서 헌혈 인구는 줄고, 수혈받는 노년층은 증가해 혈액 공급 부족 문제는 심화하고 있다.

헌혈의집을 찾아 헌혈하는 개인 헌혈자도 크게 줄었다. 직업별로 살펴보면 지난해 공공기관과 기업을 포함한 회사원이 전체 헌혈자의 34.5%(91만4277명)를 차지했다. 이어 대학생 23.9%(63만3766명), 군인 10.6%(27만9635명) 등이다. 연령별로는 같은 기간 20∼29세의 헌혈률이 36.6%(97만120명)로 가장 높았다. 이어 40∼49세가 17.5%(46만3883명), 16∼19세가 17.4%(46만2186명), 30∼39세가 16.6%(43만9078명)로 집계됐다.

◆백혈병·림프종 환자 혈액 확보 발 동동

국내 혈액 수급 문제가 만성화하면서 백혈병, 림프종처럼 정기적인 수혈이 필요한 혈액질환 환자의 고민은 더 깊다. 환자와 가족은 헌혈량 감소에 어쩔 수 없이 지정 헌혈자를 직접 구하고 있다.

지정 헌혈은 헌혈자가 혈액을 주고자 하는 환자의 등록번호를 헌혈 기관에 알려주면 해당 환자에게 직접 수혈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실제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중증 환자의 가족이 지정 헌혈을 요청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혈액암 환자의 가족인 40대 박모씨는 “아버지가 조혈모세포(골수)를 이식받아 빈혈이나 장기출혈을 겪기 쉬운데 이때 적혈구와 혈소판을 수혈받지 못하면 생명이 위태롭다”면서 “지정 헌혈 요청을 위해 주변에 아버지의 투병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어 금전적 문제는 물론 심리적 부담이 크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 이런 현상은 수치로도 나타난다. 2021년 헌혈의 5.4%에 해당하는 14만2355건의 혈액을 환자와 환자 가족이 직접 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여기에 일반 헌혈은 감소하는 반면 지정 헌혈은 증가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헌혈 현황 자료’를 보면 지정 헌혈은 2018년 1만9344유닛(1회 헌혈용 포장 단위)에서 2021년 14만2355유닛으로 4년 새 7.3배 늘었다.

서울 종로구 헌혈의집 광화문센터에서 한 시민이 헌혈하고 있다. 뉴시스

◆헌혈이 질병 옮긴다?… 잘못된 인식도 수두룩

‘헌혈로 에이즈를 유발하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와 같은 질병에 걸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말이다. 한때 온라인을 중심으로 이런 말이 퍼지기도 했지만 헌혈에 사용하는 바늘, 혈액 백과 같은 모든 의료기기는 무균 처리된 일회용 제품으로 한 번 사용 후 모두 폐기해 질병에 걸릴 위험은 낮다는 게 혈액관리본부의 설명이다. ‘헌혈을 많이 하면 혈관이 좁아진다’는 말도 있지만 이 또한 잘못된 인식이다. 혈관은 외부로부터 바늘이 들어오면 순간적으로 수축할 수 있지만 곧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므로 헌혈을 많이 한다고 해서 혈관이 좁아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적십자가 혈액으로 ‘피 장사’를 한다는 부정적 인식 역시 사실과는 다르다. 적십자는 헌혈로 모은 혈액을 병원에 공급할 때 혈액 수가를 받고 있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다. 국내 혈액 수가는 일본, 미국 등 주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여기에 혈액 수가는 혈액관리본부의 인건비, 의료품비, 헌혈의집 임대료와 운영비 등에 쓰인다.

혈액관리본부 관계자는 “국내 헌혈 추이를 보면 자칫 정상적인 혈액 공급 시스템이 마비될 수 있는 심각한 혈액 부족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며 “혈액 부족으로 환자의 생명이 위협받지 않도록 모두 헌혈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