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쌀로도 만들 수 있을까 [명욱의 술 인문학]

설 연휴 전날인 지난 20일 독특한 소주 시음회가 서울 잠원동에서 열렸다. 리빙 인문학 저술가이자 위스키 애호가인 김지수 작가가 기획한 행사로, 국내에서 출시한 오크통 숙성 소주 4종을 마셔보는 행사였다. 화요 XP(41도), 마한 오크(46도), 진맥 소주 시인의 바위(54.5도), 토끼 골드(46도)를 위스키와 비교 시음했고 핫해지고 있는 한국형 위스키에 대한 가능성을 가늠해봤다.

이들은 색깔만 보면 위스키와 흡사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위스키 등을 숙성하는 오크통에서 숙성했기 때문. 즉 나무 색과 향이 배어 나왔다. 또 위스키가 허용하는 쌀 및 밀 등 주요 곡물을 사용했다. 알코올 함량도 위스키의 기준인 40도가 모두 넘는 만큼 상당히 위스키에 가까운 주류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위스키라고 부르지는 못한다. 위스키라고 표기하기 위해서는 당화과정에 맥아가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는 맥아 대신에 누룩(입국 포함)이 들어갔다. 주세법상으로는 위스키의 옷을 입은 고급 소주라고 볼 수 있다.

한국형 오크통 숙성 소주 화요 XP(41도·왼쪽부터), 마한 오크(46도), 진맥 소주 시인의 바위(54.5도), 토끼 골드(46도).

맛 비교를 위해서는 기준을 잡아야 했다. 그래서 첫 잔은 위스키로 시작했다. 김 작가가 추천한 전설적 마스터 블렌더 빌리 워커의 작품 글렌알라키 8년이다. 오크통 숙성 연수는 짧지만 맛과 풍미는 비교하기에 최적이라고 불린다.



비교 시음을 진행하자 오크통 숙성 소주들의 맛이 드러났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닌 다름의 특성이다. 서로 다른 맛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된 특성이 있었다. 위스키에서 나오는 스모키함이 적었고 질감도 매끄러웠다. 껍질을 가진 맥아보다 이미 도정을 해 놓은 쌀이 촉감 면에서는 더 부드러운데, 오크통 숙성 소주는 그 질감이 술 속에 들어간 듯했다. 또 위스키에 들어가는 맥아는 석탄, 가스불, 피트(이탄) 등을 사용해서 맥아를 건조한다. 오크통 숙성 소주는 기본적으로 곡물을 찌다 보니 구워진 불맛 자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불맛이 적어지면 음식과 매칭이 더욱 수월해진다. 통밀을 쪄서 만든 진맥 소주 시인의 바위는 54.5도 고도수임에도 불구하고 은은한 과실향이 났으며, 마한 오크는 초콜릿과 바닐라향이 잔잔히 드러나 무척 매력적이었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사람 모두 오크통 숙성 소주를 통해 한국의 라이스 위스키에 대한 가능성을 체감했다. 최근에 김포의 김창수 위스키, 남양주의 쓰리소사이어티 등 국산 위스키를 직접 만드는 곳이 생겨났다. 그리고 신세계, 롯데도 위스키 제조를 위해 제주도 등에 부지를 마련했다고 한다.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

최근에 위스키 시장이 확장되는 이유는 맛 그 자체도 있지만 위스키가 품은 다양성에 있다고 본다. 각 지역 및 여러 숙성환경, 그리고 나라마다 그들의 스타일을 담은 개성 있는 제품이 만들어지고 있다. 소비자에게는 선택의 옵션이 풍부해졌고, 마시고 취하는 문화가 아닌 취미로 즐기는 영역으로 발전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 쌀과 밀로 발효 및 증류, 우리 오크통에 숙성한 한국형 위스키가 더욱 많이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여기에 전통의 누룩 등도 일부 사용할 수 있다면 한국만의 독특한 위스키도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위스키의 매력은 단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닌 변화의 가치를 품은 진화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최고위 과정,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넷플릭스 백종원의 백스피릿에 공식자문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