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판가에 ‘진출’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늘고 있다. 기존의 정신건강의학책이 우울증이란 무엇이고, 어떤 치료를 받고 어떤 약을 먹느냐는 전문적인 정보 제공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최근에는 공감과 위로, 치유가 중심이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상담하듯, 친구에게 조언을 건네듯,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김은영 서울의대 교수, 정찬승 마음드림의원 원장, 경희대병원 백종우·백명재 교수, 전진용 울산대병원 교수 등 9명의 의사가 본인의 경험담을 편안하게 풀어낸 ‘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가 이달 초 출간된 것을 비롯해 최근 6개월여간 나온 정신과의사의 심리상담 에세이는 줄을 잇는다. 인터넷에서 누적 조회 수 30만뷰를 기록한 뉴스레터 ‘언니단’을 엮은 ‘언니의 상담실’ 역시 여성학자이면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반유화 작가가 쓴 책이다. 인천성모병원 허휴정 교수는 마음과 몸이 연결됐다는 점에서 ‘마음이 힘들면 몸을 살짝 움직입니다’를 펴냈고, 정두영 유니스트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는 ‘마음은 단단하게 인생은 유연하게’를 지난해 8월 출간했다. 이외에도 ‘걷다 보니 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공황인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나는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 등 다양한 책이 서점가에 나왔다.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는 최근 50만부 판매를 돌파, ‘스페셜 에디션’이 나오기도 했다. 2018년 출간 후 4년 만에 50만부의 판매고를 올린 것이다. 이 책은 2019년 공공도서관 비문학 분야 도서 중 대출 1위를 기록할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높은 수요에 따라 국내 의료진뿐 아니라 해외에서 인기를 얻은 심리 치유책도 봇물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두 달 새만 ‘우울에서 벗어나는 46가지 방법’, ‘적당히 느슨하게 조금씩 행복해지는 습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고통’, ‘좋은 운은 좋은 사람과 함께 온다’ 등이 연이어 서점가에 나왔다.
‘당신이 옳다’를 펴낸 해냄출판사 관계자는 “최근 도서 분야 판매량이 매년 20∼30%씩 줄어들 만큼 판매량이 많지 않다. 이런 와중에 50만부는 불과 3∼4년 전 80만부와 유사한 수준”이라며 “책 판매량은 처음 출간 이후 1년 안에 다 나오는데 ‘당신의 옳다’의 경우 매년 비슷한 판매량을 보일 만큼 꾸준히 사랑받았다. 그만큼 마음이 지치고 힘들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많은 것을 느꼈다”고 전했다.
각 책의 부제는 이를 대변한다. ‘상처와 관계를 치유하는 여행기’, ‘정신과 의사가 권하는 인생이 편해지는 유연함의 기술’, ‘낙인과 혐오를 넘어 이해와 공존으로’, ‘지식이 아닌 공감을 전하는 이야기’ 등 공감과 치유에 방점을 찍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경우 단순히 약물 처방뿐 아니라 ‘상담’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대부분 언변도 좋고 전하고 싶은 말도 많아 글을 쉽게 풀어쓴다”며 “최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이 진료실을 넘어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상처를 감추고 어긋나던 청년을 결국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게 한 대사처럼, 요즘 사람들이 듣고 싶었던 말 역시 위로와 공감인 셈이다. 지금 흔들리고 있는 당신에게 정신과 의사들이 나지막이 글로 전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라고.
◆백명재 경희대병원 교수 “일상적 트라우마, 남의 일 아닌 우리 모두의 일”
“우리 사회는 일상적 트라우마에 노출돼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 등 대형 재난뿐 아니라 학교폭력, 성폭력, 교통사고, 직장 내 괴롭힘 등이 계속되고 있는 거죠. 이런 일상적 트라우마가, 남의 일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공감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근 동료 의사들과 ‘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를 펴낸 백명재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25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의료진의 심리치유 에세이가 늘어난 데 대해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지적했다.
백 교수는 중증정신질환 위주였던 과거에 비해 최근에는 직장, 인간관계 문제 등으로 우울증, 불면, 공황장애 환자들이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변화를 설명했다. 하지만 경증이라고 접근법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겉으로 위태롭고 우울해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전혀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렵게 힘든 얘기를 꺼냈을 때 ‘이겨내면 되지’, ‘지금까지 잘해왔잖아’라고 웃어넘기면 다시는 이런 얘기를 꺼내지 않게 됩니다. 상대방이 신호를 보낼 때보다 세심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거죠.“
백 교수는 사회 전반적으로 환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개선돼야 함을 강조했다. ‘라떼는 말이야’ 식으로 견딤을 강요하거나 ‘꾀병’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군대가 대표적이죠. 군대 복무 기간이 이전보다 절반가량 줄고, 가혹행위도 줄어서 환경이 좋아졌는데 ‘왜 너는 못 이겨내냐’는 시선으로 ‘꾀병’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아요. 간부급에서 그런 시선을 가진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이번 책을 통해 의료진이 개인의 경험담, 트라우마를 털어놓으며 환자에게 공감과 위로로 다가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백 교수는 책을 통해 심각하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살과 트라우마, 중독 등의 문제에 사회의 관심이 커졌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자살로 인해 사망자가 1년에 1만5000여명에 이릅니다. 중독, 트라우마 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상담으로 충분히 호전될 만한 분들이 책을 통해 좋은 위로를 받고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