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로 몰락, 코로나로 부활…‘25년 지각 총리’ 안와르의 돌파구는? [박종현의 아세안 코너]

(2) 취임 2개월 안와르 말레이시아 총리
학생운동에서 장관, 부총리, 민주화운동, 투옥 거쳐
‘멘토’ 마하티르와 반세기…후원·질곡·협력의 시간
마하티르와 함께 탯줄 묻은 UMNO 지배 체제 끝내
2월 초까지 이웃 4개국 국빈 방문 완료 예정

동남아 지역 혹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은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동남아는 미·중 갈등이 디폴트(고정값)로 설정된 최근은 물론 2차례의 세계대전 시기에도, 더 거슬러 중세시대에도 각축의 공간이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등 서양 강대국의 영향력이 커진 현대사 이전엔 중국과 인도가 번갈아가며 영향력을 높였던 지역이다. 이제는 수십 년 전 일본에 이어 한국도 동남아 지역에서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한국은 앞서 문재인정부에서 신남방정책을, 윤석열정부에서는 신인도·태평양 정책을 내놓았다. 한국의 대외무역 분야에서 베트남 등 아세안 회원국의 비중이 커졌으며, 아세안의 외교무대 발언권은 중요하다. 세계일보는 아세안 주요 지도자를 초청해 현안을 집중 토론하는 아세안포럼을 연례 개최해 왔다. 이런 관심을 바탕으로 아세안의 주요 일정과 인물을 짚는 <아세안 코너>의 부정기적 연재를 시작한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가 아시아를 강타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말레이시아 상황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안와르 이브라힘 당시 부총리의 총리 승계를 기정사실의 미래로 여겼다. 절대 권력자였던 마하티르 모하메드 총리가 안와르의 정치적 미래를 보장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마하티르는 이슬람 학생 운동가였던 안와르의 정치권 입문에서부터 그의 성장, 후계 수업까지 사실상 책임진 것으로 보였다.

 

말레이시아가 외환위기에 닥칠 무렵인 1997년 마하티르 모하메드 당시 총리(오른쪽)와 안와르 이브라힘 당시 부총리의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서로를 내쳐야 했던 마하티르·안와르

 

두 사람을 갈라놓았던 외환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한 이견은 말레이시아 현대 정치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외환위기에 서구자본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으니, 자체 역량을 통해 극복하자는 게 마하티르의 생각이었고, 당시 부총리로 재무장관을 겸하고 있던 안와르는 국제사회의 눈높이에 맞춰 재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차이는 결국 멘토·멘티의 관계를 정적 사이로 바꾸게 했다. 표면적으로 가해자는 마하티르였으며, 피해자는 안와르로 보였다. 마하티르는 서구적 가치를 바탕으로 하려는 안와르의 방식이 (그릇된 욕망을 지닌) 서구에 말레이시아의 운명을 맡기겠다는 것으로 인식했을 개연성이 있다. 필자는 마하티르 총리를 몇 차례 인터뷰하면서 그가 말레이시아에 대한 열정을 여러 차례 피력했던 점을 기억하고 있다. 그의 발언은 조국을 위해 외환위기 당시 후계자를 버려야 했다는 의미로도 풀이됐다.

 

자신이 점찍었던 안와르의 몰락을 부채질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안와르를 지켜봤던 멘토 마하티르의 심정은 어떻게 변했을까. 멘토가 멘티에게 가진 진실한 감정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수년이 지난 뒤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5대 총리 압둘라 바다위는 물론, 강인한 후계자로 여겼던 6대 총리 나집 라작의 잘못들이 분출했으니 후회가 밀려왔을 수도 있다.

 

나집 등 집권세력을 향해 비판을 이어오던 마하티르는 2016년 부패 종식을 내걸며, 정계 은퇴선언을 번복했다. 2003년 총리직에서 내려온 지 13년만의 복귀 선언이었다. 마하티르의 선언은 일부 국민에 감흥을 불러일으켰지만, 총선 승리는커녕 공고했던 집권세력에 균열을 야기하기도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은퇴선언 번복 직후만 해도 예상은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하티르의 정계 복귀는 새로운 정치사를 예고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무슬림 시민단체 회원들이 27일 쿠알라룸푸르 페트로나스 타워 앞에서 최근 벌어진 덴마크 반이슬람 활동가들의 쿠란 불태우기 시위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쿠알라룸푸르=AP연합뉴스

#‘정치는 생물’…옥중에서 정적 마하티르와 손잡아

 

마하티르는 자신이 키웠던 집권연립의 중심이었던 UMNO(통일말레이국민조직)를 버리고, PPBM(통일원주민당)을 창당해 DAP(민주행동당), PKR(인민정의당)과 함께 PH(희망연대)를 주도했다. 2017년 총선에서 PH는 총리후보로 마하티르를, 부총리 후보로 투옥된 안와르를 대신해 그의 아내인 완 아지자 완 이스마일을 부총리 후보로 등록했다.

 

첫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옥중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온 안와르와 마하티르의 협력은 궁극적으로 6대 총리 나집의 퇴각에 결정타로 작용했다. 2018년 5월 치러진 조기총선에서 두 정치인의 협력 구도는 집권세력에 대한 국민적 분노감을 결집했다. 두 지도자가 중심이 돼 결성된 4개 정당 연합체 PH는 기존 여당연합체 BN(국민전선)에 압승을 거뒀다. PH의 승리로 61년 동안 이어진 BN의 장기집권 체제가 막을 내린 것이다.

 

2018년 말레이시아 조기선거는 ‘정치는 생물’이라는 점이 여실히 확인된 선거였다. 20년 전 총리와 부총리로 장기집권 여당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마하티르·안와르가 자신들의 탯줄이 뭍은 61년 집권연합체 BN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다. 거기에다가 마하티르의 총리직 재등극도 세계 정치사에서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마하티르가 2003년 퇴임 이후 18년만에 다시 총리직에 올랐을 때 그는 이미 90세를 넘긴 나이였다.

 

#61년 1당 6명 총리 vs 4년간 정권교체 반복에 4명 총리

 

마하티르는 다시 총리가 되자마자 공언대로 안와르를 사면 복권했다. 안와르는 2018년 10월 재보선을 통해 정치권의 핵으로 등장했다. 아직 남은 마하티르의 결정적인 약속은 총리직을 짧게 수행한 뒤, 안와르에게 자리를 계승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약속대로 마하티르가 안와르에게 최고 권력자 자리를 넘겨줬으면 됐지만, 정국은 혼란 양상을 보여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혼란 와중에 마하티르는 2020년 2월 재신임을 노린 정치적 승부수로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번엔 승부수가 통하지 않았다. 국왕은 여러 정당의 지도부와 회동한 뒤, 마하티르 혹은 안와르 측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총리 자리는 지지 의석을 확보한 무히딘 무히딘의 차지였다.

 

무히딘이 8대 총리가 됐을 때 안와르는 어느새 70세가 훨씬 넘는 정객이 된 상태였다. 말레이시아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악조건에 노출돼 있었다. 여론은 무히딘 등의 리더십에 회의적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8대 총리 무히딘이 코로나19 대응 부실 등을 이유로 물러나며, 2021년 8월 UMNO의 이스마일 이스마일이 9대 총리가 됐다. 이번엔 이스마일이 의회 해산을 명령하고, 2022년 11월 총선을 실시했다. UMNO는 의회해산을 통해 강력한 여당으로 재탄생하기를 희망했지만, 결과는 오산으로 드러났다. 정부를 불신하며 대안을 요구했던 여론이 요지부동이었던 것이다. 그 눈길은 안와르로 향했다. 안와르 입장에서는 코로나19라는 외부 요인이 1990년대 말 외환위기가 자신의 미래를 옥죄게 된 계기가 된 것과는 반대의 영향에 노출됐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왼쪽)와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이 25일 브루나이 반다르세리베가완 소재 왕궁에서 만나 인사하고 있다. 안와르 총리 페이스북

#25년 지각 총리 안와르의 어려움…외교가 돌파구 될까

 

수년 전 정권교체로 밀렸다가 간신히 권좌를 되찾았던 UMNO는 지난해 총선에서는 아예 제3당으로 밀렸으며, 안와르의 PH는 제1당이 됐다. 그러나 PH의 의석은 83석으로, 무히딘 전 총리의 PN(국민연합)의 73석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이스마일 당시 총리의 BN의 의석은 30석에 그쳤다. 누구도 222석의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세력은 복잡한 수를 계산했다. 3당으로 밀린 BN이 어느 세력과도 연대하지 않고, 야당으로 남겠다고 선언하며 상황은 더 복잡하게 흘러갔다. 다행히 BN이 PN이 아니라면 다른 세력과는 통합정부를 구성하겠다고 하면서 복잡한 상황이 정리될 수 있었다. PH와 BN이 의석을 합쳐 113석이 되면서, 연합세력이 하원 222석의 과반을 가까스로 넘은 것이다. 국왕과 정치세력의 여러 논의 끝에 안와르는 지난해 11월 24일 10대 총리가 됐다. 25년 타의로 꿈을 이루지 못했던 정치인의 총리직 ‘지각 수행’이었다. 그럼에도 집권여당의 연대와 연합은 불안정한 구조에 노출돼 있다.

 

이제 총리직에 오른 지 2개월. 안와르는 총리의 꿈을 이뤘지만, 튼튼하지 못한 연정에 최소한 당분간은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61년 동안 옛 집권세력에서는 6명의 총리가 집권해 체제가 안정된 것으로 보였던 것과는 다르다. 2018년 마하티르의 7대 총리직 수행 이후 2020년 8대, 2021년 9대, 2020년 10대 총리 등 불과 4~5년에 총리직에 이름을 올린 이는 4명이나 된다. 그만큼 집권당의 체제가 완성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춘절 연휴 분위기가 이어진 28일 말레이시아 페낭주 조지타운 소재 한 사찰 앞에서 중국계 주민들이 춘절 축제를 즐기고 있다. 조지타운=AP연합뉴스

여기에다가 내부적으로 말레이와 기타 민족의 갈등, 강경 이슬람주의와 세속 이슬람주의의 이견 등 총리 안와르를 둘러싼 환경은 난수표처럼 얽혀 있다. 그럼에도 안정적이지 못한 정치상황은 민주화의 산통 과정으로 해석된다. 정치권 입문 이후 사실상 권력 최정상을 앞두고 좌절을 경험하며 재야인사를 거쳐 연정의 장치를 통해 집권한 안와르가 다문화, 다민족 체제의 복잡다기한 말레이시아 정치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여지도 크다. 일례로 안와르는 28일 중국계 등과의 소통 강화를 위해 쿠알라룸프르 잘란 암팡에 소재한 MCA(말레이시아중국인협회)의 신년 하례식에 참석해 경제성장 등을 위해 적극 노력하자고 강조하기도 했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오른쪽)와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이 25일 브루나이 반다르세리베가완 소재 왕궁에서 양국 정상회담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안와르 총리 페이스북

더구나 외부적으로는 민주화의 상징 인물로 국제사회의 지지세가 크다는 점은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0년대 말 집권한 한국의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이 국내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외교적 성과를 통해 위기를 극복했던 점을 고려하면, 안와르는 외교를 주요 돌파구로 고려할 수도 있다. (DJP연합은 수년 뒤 대북 정책 등에 대한 이견과 약속 불이행에 따른 잠재 갈등 노출로 갈라서기는 했다.) 어찌됐건 안와르가 인도네시아와 브루나이를 지난 9일과 25일 각기 이틀 일정으로 방문하고, 이어 1월 말과 2월 초에는 싱가포르와 태국을 방문하는 것은 외교를 중시하는 행보로 보인다.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 4개국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싱가포르, 태국을 방문하면서 우의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안와르는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취임을 축하하고 양국 관계 증진을 바라는 내용을 담은 친서를 보냈다고 밝혔다. 페이스북에 친서도 사진으로 찍어 올렸다. 외교를 적극 챙기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연재 순서>

레포르마시의 상징 안와르…30년 만에 총리에 [박종현의 아세안 코너]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127515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