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는 주의 총생산이 3조6000억달러에 이르는 미국 최고 부자 동네다. 세계 인재를 빨아들이는 실리콘밸리와 영화계를 주름잡는 할리우드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나 그렇듯 캘리포니아에도 그늘진 곳은 있다.
샌프란시스코만에 접한 앨러미다 카운티와 콘트라코스타 카운티. 항만과 고속도로를 통해 수시로 선박과 대형트럭이 오가는 이곳엔 유독 대기질이 나쁘고 천식환자 내원비율이 높은 지역이 많다. 그리고 대개 이런 곳에는 흑인과 라틴계 저소득층이 많이 산다.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만 대기질관리지구(BAAQMD)는 두 카운티에서 천식환자가 있는 취약 가구를 대상으로 ‘샌프란시스코만 건강가정 이니셔티브’(BAHHI)라고 하는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다. 가정을 방문해 온습도를 확인하고 오래된 카펫이나 지붕 누수, 곰팡이 등 천식 유발원인이 있는지 조사해, 그 결과에 따라 집을 개조한다. 또 자동차 배기가스 같은 외부 오염물질 유입을 막고, 집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창호를 교체하거나 가전제품을 바꿔주기도 한다. 200만달러(약 25억원)로 천식환자 105명을 포함해 약 1000가구가 이런 혜택을 볼 전망이다.
산타클로스 선물 꾸러미 같은 이런 프로그램의 예산은 어디서 왔는지, 보건 당국 등 다른 기관과 마찰은 없었는지 묻자 샌프란시스코만AQMD의 이다이나 자모라 박사의 대답에서 생각지 못했던 회사명이 나왔다.
“여러 기관, 단체와 협업하고 있는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어요. 운 좋게도 VW펀드를 활용했거든요. 폴크스바겐 디젤게이트 기금 말이에요.”
BAHHI에 배정된 200만달러는 폴크스바겐이 디젤게이트로 미국 땅에서 지불한 전체 금액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2015년 9월 미 환경보호청(EPA)은 폴크스바겐 디젤차에서 배출가스 저감장치 조작 소프트웨어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배출가스 인증시험을 받을 땐 저감장치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했다가 실제 도로를 달릴 땐 저감장치 작동률을 떨어뜨린 것이다. 미국에서 디젤차를 팔려면 주행거리 1㎞당 질소산화물이 0.044g 이하여야 하는데 실제론 최대 1.51g이 배출됐다.
폴크스바겐은 EPA 발표 후 곧바로 이 같은 사실을 인정했지만, 기업 이미지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다.
한국도 부랴부랴 진상조사에 나섰다. 환경부는 같은 해 11월 15개 차종 12만5000여대에서 배기가스 불법 조작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도 처리 결과는 천양지차였다.
2016∼2017년 EPA는 법원의 감독 아래 청정대기법(CAA)을 위반한 폴크스바겐과 세 가지 합의안을 성사시켰다. 우선 기한 내 2000㏄급 피해 차량의 85% 이상을 리콜 조치하고, 지키지 못했을 경우 미달성률 1%포인트당 8500만달러를 ‘완화 신탁기금’으로 지불하게 했다. 그동안 팔렸거나 리스 계약된 차량은 2015년 9월17일 중고차 가격을 기준으로 재매입하거나 아무 조건 없이 리스 계약을 종료하도록 했다. 이날은 EPA가 디젤게이트 의혹을 발표하기 전날이다. 소비자의 금전적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조치다. 회수한 차는 법적 기준에 맞게 수리해야 중고시장에 되팔거나 수출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폐차해 재활용해야 한다.
3000㏄급을 대상으로 한 2차 합의안에도 리콜률 85% 및 미달성 1%포인트당 550만∼2100만달러 지불 등 비슷한 내용이 담겼다.
BAHHI에 투입된 폴크스바겐 펀드는 3차 합의안으로 조성됐다. 1차 합의에 따라 27억달러를, 2차 합의에 따라 2억2500만달러를 완화 신탁기금으로 내놓도록 했다. 완화 신탁기금은 폴크스바겐이 초과 배출한 질소산화물을 상쇄하는 데 쓰인다. 미국 50개 주와 푸에르토리코, 워싱턴이 폴크스바겐 차량 등록 대수에 따라 기금을 나눠 갖고, 구체적인 용처는 각자 결정하도록 했다.
이와 별도로 무공해차량(ZEV) 투자금 20억달러도 내놨다. 에디 창 캘리포니아 대기자원위원회(CARB) 국장은 “전기차를 홍보하고, 충전소 등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쓰이게 된다”며 “여기서 말하는 전기차는 물론 폴크스바겐 차량을 홍보하라는 게 아니라 정책 홍보를 말한다. ZEV 투자금 운용을 위해 ‘일렉트리파이 아메리카’라는 회사도 설립됐다”고 했다.
일렉트리파이 아메리카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많은 공용 고속충전기를 운영하고 있다. 2017년부터 2026년까지 약 3개 연도씩 묶어 4차 계획까지 세웠는데 올해가 포함된 3차 계획 연도 기간에는 ‘미국인 90%가 충전소 반경 50마일(약 80㎞) 이내 살게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우리 팀이 방문한 미 캘리포니아주 남부 리버사이드에 들어선 미 최대 제로에너지 빌딩 ‘메리 니컬스 캠퍼스’ 건설에도 폴크스바겐 기금이 쓰였다.
여기에 민형사상 벌금 43억달러까지 포함해 폴크스바겐은 지금까지 333억달러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염을 유발한 폴크스바겐에 대기질 개선과 취약계층 보호, 소비자 피해보상까지 폭넓은 책임을 물은 것이다.
◆19만대 과징금 1153억… 어디에 썼을까
한국 정부도 2015년 11월 12만5000여대에 14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 후로 폴크스바겐뿐 아니라 닛산, 스텔란티스 등으로 전선을 넓혀 디젤차 배기가스 불법 조작을 일망타진하는 듯했다. 지금까지 19만여대에서 조작을 확인해 과징금 1153억원을 징수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총 407억원 규모의 과징금을 걷었다. 그러나 폴크스바겐이 디젤게이트와 관련해 공개적으로 진 책임은 여기까지다. 환경개선 노력이나 목적성 기금 조성은 없었고, 소비자에게도 리콜 조치를 한 게 고작이다. 과징금도 연간 수조원의 환경개선특별회계(환특회계) 등에 섞여 어디에 쓰였는지 용처를 알 수 없다.
“과징금을 특정 용도로 쓴다, 이런 규정은 없어요. 환특회계에 묶여 수질에 쓰일 수도 있고, 대기에 쓰일 수도 있죠. 매년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예산이 아니니까 특정 용도로 관리하기 어려워요.”(황인목 환경부 교통환경과장)
공정위가 징수한 과징금도 곧바로 국고로 수납된다.
디젤게이트 소송에서 재판부의 판단도 인색했다. 국내에선 아우디폭스바겐코리아(AVK) 관계자를 상대로 형사소송과 소비자들이 낸 민사소송이 있는데 지난해 대법원은 AVK에 벌금 11억원, 박동훈 전 AVK 사장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1심엔 각각 벌금 260억원, 징역 2년 실형을 선고했지만 모두 감경됐다.
‘독일 회사(폴크스바겐)가 속여 판 사실을 알았다면 차를 사지 않았을 것이므로 손해배상을 해달라’는 민사소송에서도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균적인 소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승차감, 안전성, 연비, 상표, 디자인, 가격대 등을 기초로 어떤 자동차를 구매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통상적이라 할 것이다. … 광고상의 친환경성이 자동차 소비자에게 구매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 친환경적이라는 것은 연비가 우수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점 등으로 비춰 배출가스의 다소(多少)는 구매 결정 요소로 작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원고들이 청구한 2000만원에서 100만원만 인정됐다.
1심 재판을 맡았던 하종선 변호사(법률사무소 나루)는 “미국이나 유럽 사례에 비춰 국제적인 균형감각을 상실한 판결”이라며 “어떻게 한국 재판부가 ‘한국 소비자는 차량 구입 시 친환경성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단정적 언급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나마 서울중앙지법의 다른 민사소송에서 차값의 10%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온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것도 디젤게이트가 터지기 직전 100% 가격으로 매입하고 추가로 현금까지 지불한 미국이나 차량 구입대금 환불 및 15% 배상 집단소송 합의가 나온 독일에 못 미친다.
◆외양간은 고쳤지만 재발 막을 수 있을까
가정준 한국외대 교수는 2016년 논문 ‘미국의 강력한 소비자의 권리 어디에서 오는가?’에서 디젤게이트라는 같은 사건을 두고 두 나라에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근본 원인을 소비자 권리 보호 제도에서 찾는다.
미국은 입법 과정이 사업자(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을 사후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연방공정거래위원회(FTC)에 막강한 권한을 실어주고 있다. 기업의 불공정하거나 기만적인 행위·관행을 규정하고 금지시킬 권한을 FTC에 부여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시장실패 가운데 기업과 소비자 간 ‘정보 비대칭’이라는 문제를 풀고자 강력한 FTC를 뒀다면, 환경오염이라는 ‘외부효과’는 EPA가 담당한다. EPA는 독립 규제기관으로 심사권과 법규 제정권, 심판 권한을 갖고 있다.
미국 디젤게이트 처리도 FTC의 ‘불공정 거래’라는 판단과 EPA의 ‘환경오염 엄단’이라는 원칙이 작동한 결과다.
국내에서도 대기환경보전법을 개정해 2017년 말부터 과징금 상한을 10억원에서 500억원으로 올린 게 성과라면 성과다. 하지만 개정법 시행 이후 부과된 과징금(약 6만5000대, 1000억원) 역시 대당 150만원꼴이다. 폴크스바겐이 미국에서 완화 신탁기금과 ZEV 투자금 명목으로 낸 금액(대당 1000만원)에 한참 못 미친다.
손해배상 소송은 항소심에서 지난해 4월 화해권고 결정이 내려졌다. 내용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소송을 담당했던 법무법인 바른 측은 “소송이 진행 중인 것도 있고 종결된 것도 있는데 사건의 특수성이 있어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 없다. 종결된 사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 변호사는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8억유로), 영국(2억유로)과 비교해도 국내에서 폴크스바겐이 지불한 비용은 너무 미미하다”며 “또 폴크스바겐이 환경부와 공정위에 내놓은 과징금은 결국 피해자들이 지급한 배출가스 조작 차량 구입대금에서 나온 것이므로 일부라도 피해자(소비자)에게 돌려주고 환경개선에 쓰일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미국 사례를 고려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