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기술 탈취 행위에 대해 피해액의 3배까지 배상하도록 하는 법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손해배상 제도가 적용된 사례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도는 개선됐지만 피해 중소기업이 피해액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인정받기가 여전히 어렵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6일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2월18일 개정 시행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에 근거해 사법 판결을 받은 사례는 나오지 않았다.
개정 상생협력법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수·위탁 거래 관계에서 발생한 기술을 탈취한 행위에 대해 피해액의 3배까지 배상하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규정을 신설했다.
기술 탈취 관련 손해배상 제도는 지난해 상생협력법 시행에 앞서 2011년 하도급법, 2019년 특허법 등에도 마련됐다. 2021년 태양광전지 제조설비 업체 에스제이이노테크가 한화그룹 계열사를 상대로 하도급법에 근거해 승소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대법원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법이 보완됐는데도 재판 실무에서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피해 기업이 손해를 입증하는 어려움이 여전하다고 지적한다.
김지영 법무법인 율 변호사는 “예컨대 1억원의 손해를 입어도 1000만원 인정받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손해를 특정하고, 입증할 게 너무 많은 데다 수사만 2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밝혔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술 침해 관련 제도는 많이 보강됐으나 실제 처벌 수준은 매우 미흡하다”며 “피해 기술의 정확한 가치 산정 노력이 중요하며, 가치 산정이 정확히 돼야 처벌을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기술 이해도가 높은 인력이 대거 투입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 변호사는 “수사 기관이나 법원, 검찰 모두 개정된 법을 따라가지 못하고 예전 기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며 “기술 침해 사건 수사와 재판을 도와줄 인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기술 탈취 사례는 해마다 수십 건씩 반복 발생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정호 의원이 중기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2021년 중기부 실태 조사로 확인된 중소기업 기술 침해 피해 건수는 280건, 이에 따른 피해액은 2827억원으로 집계됐다. 이 기간 피해 건수가 가장 많았던 해는 2017년 78건이었으며, 피해 규모는 2018년(1162억원)에 가장 컸다. 중기부는 지난해 기술 탈취 현황을 포함해 현재 실태 조사에 착수한 상태이며, 올해 6∼7월쯤 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기술 탈취 근절은 윤석열정부의 국정과제이기도 하다. 지난달 헬스케어 스타트업 알고케어와 롯데헬스케어 간 아이디어 탈취 분쟁에 대해 중기부가 이례적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고 밝힌 것도 그 연장선이다. 알고케어는 사업 협력을 제안했던 롯데헬스케어가 사업 아이디어를 그대로 베껴 제품을 개발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롯데헬스케어는 신사업 검토 시점부터 디스펜서를 활용한 건기식 소분 판매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고 반박했다. 관련해 중기부는 기술 침해 행정조사 전담 공무원과 대중소기업협력재단 소속 변호사를 알고케어에 파견했다. 중기부는 양사가 기술 분쟁 조정 절차에 들어갈지 확인 중이며, 알고케어는 롯데헬스케어를 영업비밀침해 등 혐의로 고소하겠다는 입장이다.
중기부는 1분기 안으로 기술 탈취 관련 범부처 정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현행 3배인 징벌적 손배제 배수 기준을 높이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중기부는 기술 탈취 대응 관련 범부처 플랫폼을 구축하고, 재판 이후 피해 기업의 회복 지원 방안도 마련할 계획이다.
정재훈 중기부 기술보호과장은 “손배제 배수를 높이는 것은 정부의 강력한 의지 중 하나를 상징한다”며 “기술 탈취를 당했을 때 중기부가 게이트웨이(관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