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복찬이 아니냐?”
귤이 막 시장에 나오기 시작하던 1976년 겨울 어느 날,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이 담긴 리어카를 끌고 숙명여대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게 느껴진 순간, 반가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린 동생들 때문에 대학에 복학하지 못한 채 군 제대 5일 만에 회사에 취직해야 했던 그였다. 당시에는 대리점과 포장마차를 하고 있었지만, 가난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면 가끔씩 대리점을 동생에게 맡긴 뒤 리어카를 끌고 시내로 나서곤 했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시 외무부 여권과에 다닌 동창이 인도 위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친구와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것은 내가 다 살게. 대신 나하고 술이나 한잔 하러 가자.” 친구는 과일을 싣고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가는 모습에 그가 무척 어렵게 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친구는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파독 광부를 제안했다.
“일이 안 풀리면, 외국에 한 번 갔다 오면 어때? … 너, 이번만은 내 말을 좀 들었으면 좋겠다. 네 신상은 잘 알고 있으니까 서류 신청 같은 건 내가 다 해놓을게. 넌 나중에 신체검사와 면접만 잘 보면 돼.”
도와주려는 친구에게 구구한 자신의 사정을 다 설명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당시 그로선 외국 생활은 꿈도 꾸지 못할 이야기였다. 2∼3일 뒤, 그가 연락을 했을 땐 친구는 이미 광부 파독을 신청한 뒤였다. 이듬해 1월 서울 수도공고에서 신체검사와 면접을 봤다.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난 뒤 이승만정부와 4·19혁명 및 5·16쿠데타 등을 거치며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조리 두 곳씩 다녀야 할 정도로 혼란스런 삶을 살아온 나복찬씨는 1977년 10월 파독 광부 제2차 47진으로 독일로 날아갔다. 1963년 시작된 광부 파독의 마지막 기수였다.
그는 2주간의 독일어 교육을 마치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아헨(Aach-en) 에밀마이리슈 광산에 배치됐다. 그와 한국인 동료를 실은 철제 샤흐트(Schacht)가 귀가 얼얼할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지하 1000m까지 내려가던 순간, 공포와 불안이 엄습해 왔다. 이거 내가 잘못 온 것 아냐.
눈앞에 펼쳐진 지하 세계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지하 1000m의 굴속에 내린 뒤 다시 기관차 모양의 인차를 타고 무려 2㎞를 달려야 했다. 기차에서 내려서자 수많은 굴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국에서 봤던 광산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별로 나눠서 굴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는 광산에서 굴진 작업을 하다가 무너져 내린 석탄 덩어리에 깔려 입원 치료를 받는 등 두 차례나 큰 사고를 겪었지만,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진 않았다. 3년 계약한 광산 일을 모두 마친 그는 1981년 뒤셀도르프 소재의 만네스만 회사에 취직해 2008년까지 근무했다. 그 사이 주간지 ‘교포신문’ 창간에 참여했고, 특히 1999년부터 기자와 지국장으로 활동해왔다.
아내와 함께 뒤셀도르프에서 사는 그는 퇴직 이후엔 ‘교포신문’ 활동에 더욱 집중하면서 여전히 현역 기자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지난달 주한독일문화원에서 개최한 광부 파독 60년 기념 대담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하기도 했다. 나씨를 최근 용산 세계일보에서 만났다.
“올해로 광부 파독 60주년이 되기 때문에, 독일 현지에서도 봄부터 다양한 행사가 시작될 계획입니다. 김치 행사를 비롯해 영정 사진 찍기, 각종 포럼과 세미나, 영상전을 비롯한 각종 전시회, 노동절과 광복절 기념식 등 5월과 9, 10월에 관련 행사들이 절정을 이룰 겁니다.”
그의 마지막 꿈은 독일 현지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비롯한 재독 한국인 1세를 위한 쉼터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다. 그처럼 3년 계약이 끝나고 독일 현지에 남은 파독 광부는 모두 1400여명, 현재 생존자는 800명 정도다. 독일에 체류 중인 파독 간호사 출신도 3500명 정도.
“파독 광부들은 3년 의무근로 기간이 끝난 뒤 연금을 중간에 정산하는 바람에 연금 수령액이 많지 않아서 조금 불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죠. 물론 우리들의 제일 큰 걱정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대한민국에서 잊히는 것이고요. 지나간 일, 옛날 일이 된다면, 우리는 정말 버티기 힘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