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대체불가토큰(NFT) 시장에 들어온 때가 2021년 12월쯤이었는데 그때는 열풍이었죠. 지난해 4~5월부터 점점 거품이 꺼져가는 분위기예요.”
NFT 작가로 2년째 활동 중인 ‘헤븐’(예명) 작가는 그림책 형식의 NFT를 해외 최대 NFT 거래소인 오픈씨(Opensea)에 올리며 활동하고 있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그림, 영상 등 디지털 자산의 소유권을 인증하는 토큰이다.
헤븐 작가는 최근 NFT 시장에 대해 “거래가 잘되지 않으니 여전히 ‘이거 가지고 뭐하지’라는 인식이 있는 거 같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새로운 NFT 마켓이 생겨나고 있지만 작가 유치조차 매우 어려워하는 상황”이라며 “초기에는 NFT에 대한 청사진이 많이 제시됐지만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에 적용되는 트래블룰(가상화폐 거래소의 신원정보 기록 의무화) 규제 등에 따라 가상화폐를 통한 구매와 환금이 어려워 거래가 어려워진 것이 (시장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NFT 시장 90% 위축…가상화폐 폭락이 원인
헤븐 작가가 NFT 시장에 뛰어든 2021년만 해도 미국의 한 디지털 아티스트가 만든 NFT가 830억원에 팔리는 등 NFT 시장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위변조가 불가능한 블록체인 기술로 디지털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점이 NFT가 인기를 끈 가장 큰 이유였다. 전시공간이 마땅치 않은 신진작가에게는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지 않은 NFT 기술이 새로운 기회로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NFT 작품이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것보다 기업의 멤버십, 작가들의 이벤트 등 마케팅 수단으로 NFT 기술이 활용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NFT 시장이 급격하게 위축된 근본적인 원인은 NFT 거래 기반이 되는 가상화폐 가치가 FTX 거래소 파산, 테라·루나 사태 등으로 폭락했기 때문이다. NFT는 토큰이기 때문에 특정 가상화폐의 블록체인을 활용해 제작할 수 있는데 가상화폐의 큰 변동성과 더불어 단기 투자수단으로 거래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필? 게임? NFT 어디에 쓰나
NFT 업계의 최대 고민은 사용처다. NFT 기술이 주목받으면서 NFT를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거나 메타버스나 게임 공간에서 전시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모델이 나왔다. 트위터는 지난해 초 유료 구독서비스를 통해 NFT를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후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에서 NFT 프로필 도입이 논의됐지만 NFT 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으면서 아직 상용화되지 않고 있다. 게임이나 메타버스에서 NFT 활용은 NFT가 가상자산으로 분류되면서 벽에 부딪혔다. 정부는 게임산업법에 따라 게임 내에서 가상자산, NFT를 제공하는 것을 제한하는 내용이 담긴 게임 경품 규제를 논의하고 있다. NFT도 가상화폐를 통해 거래될 수 있는 만큼 사행성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해외 커뮤니티에서 떠오르는 챗GPT, 정체된 메타버스, 사장된 NFT 기술의 풍자 이미지가 공유될 정도로 다른 기술시장에 비해 NFT 발전은 다소 위축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은석 국제디지털자산위원회 이사장(목원대 교수)은 “NFT가 넘어야 할 산 중의 하나가 쇼잉(Showing·보여지는 것)”이라며 “게임 아이템이나 메신저와 NFT가 결합되면 쇼잉의 문제가 사라질 텐데 아직은 NFT라고 보여줬을 때 기존과 무엇이 다를까라는 점에서 물음표가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시장규모는 위축됐지만 NFT는 여전히 창작자의 미래”
위변조가 불가능하고 창작자의 저작권을 보장해주는 NFT는 여전히 예술가들을 위해 필수적인 기술인 것은 분명하다. 업계에서는 NFT의 다양한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원숭이 그림의 NFT ‘지루한 원숭이들의 요트클럽’(BAYC)은 NFT가 팬들의 커뮤니티 회원권, 입장권 같은 역할을 하면서 가치가 뛰었다.
배운철 한국NFT콘텐츠협회 위원장은 “NFT를 가상화폐로 결제하니까 가상화폐 가격에 따라 시장규모가 확 줄어든 측면이 있지만 디지털 시장에 대한 거품이 빠지면서 NFT가 점차 가치를 찾아가는 분위기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며 “스타벅스 카드처럼 NFT를 멤버십 형태로 발행(민팅)해 활용하는 것도 요즘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위원회가 최근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미술품, 음악저작권 등 유무형 자산을 조각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토큰증권’을 허용하는 방침을 밝히면서 NFT가 토큰증권 형태로 발행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김정민 법무법인 로베이스 변호사는 지난달 30일 국회 디지털자산특위 보고회에서 “NFT는 커뮤니티형, 자산형, 게임형, 참여형 등 다양한 유형에 따라 증권성 여부가 다르다”며 “어떤 NFT가 가상자산에 해당하고 어떤 NFT가 증권성을 가졌는지 여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선종엽 루트라 대표 “NFT는 사고파는 것보다 기술이 먼저”
“학교에서 대회가 끝나면 상장을 주는데 이것을 대체불가능토큰(NFT) 기술로 남겨두려고 해도 청소년에 대한 코인 규제와 엮여 어려움이 있습니다. NFT는 사고파는 게 아니라 기술이 먼저입니다.”
지난 2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디지털 기술혁신 기업인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한 대학생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정부의 NFT 규제에 대한 고충을 털어놨다.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CES 2023’에서 NFT 기술을 활용한 포토부스로 ‘최연소 혁신상’을 받은 포스텍 4학년 선종엽(23) 루트라 대표였다.
선 대표는 24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NFT는 내 것을 인증해주는 기술인데 관련 법안이 논의되는 것을 보면 가상자산이란 단어와 함께 분류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며 “NFT라는 글자가 가상자산과 결합되면 많은 게 복잡해져 윤 대통령에게 고민을 털어놨다”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은 “NFT 기술과 코인은 다르다”고 선 대표의 지적에 동의했다고 한다. 선 대표는 “놀랍게도 윤 대통령이 상황 이해를 잘해주셨고 NFT를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이미 알고 계셨다”며 “함께 배석한 최상목 경제수석에게 대안을 지시했고 같은 날 오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는 2차관 주재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고 전했다.
선 대표는 2021년 포스텍 선후배 4명과 루트라를 창업해 ‘클램’이라는 포토부스를 시장에 내놨다. 클램에서 사진을 찍으면 이용자가 현장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위치, 시간, 브랜드 디자인 등이 기록된 사진이 출력된다. 동시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NFT 카드가 발행된다.
선 대표는 이 아이디어를 활용해 학교 행사나 외부 전시회 순간을 NFT로 남겨줄 수 있는 기획을 냈다. MZ세대에 맞는 나만의 한정판 굿즈를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NFT가 가장자산과 연결되면서 19세 미만에게 제공할 수 없는 등 각종 제약이 따랐다. 선 대표가 대통령을 찾은 이유였다.
선 대표는 “NFT라서 특별한 게 아니라 NFT는 소유권을 인증하는 기술일 뿐”이라며 “인공지능(AI) 딥러닝도 서비스를 이용하고 나서 이것이 딥러닝 기술을 응용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멤버십 카드를 만들 때 자연스럽게 NFT 기술이 활용됐다고 인식하는 순서가 맞다”고 설명했다. 이어 “NFT로 증명을 해주기 시작하면 그 소유권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돈이기 때문에 예술품처럼 가상자산과 엮이는 부분이 있겠지만 기술을 활용한 서비스의 경우 자연스럽게 구분되는 흐름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