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927년 늦가을. 환갑이 넘은 백제(이하 후백제)의 왕 견훤은 지도를 보며 자신을 둘러싼 ‘올가미’를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의 왕 왕건과 신라의 왕 경애왕이 합동으로 구축한 ‘덫’이었다. 그해 1월(이하 음력), 고려와 신라는 합동으로 군대를 내어 후백제의 영토였던 경상북도 예천을 뺏었다. 고려는 3월에는 충청남도 홍성군을 공격했고 직후 경북 문경시의 근품성을 함락시켰다. 고려는 4월에는 충남 공주를 공격했고 수군을 동원해 한반도를 한 바퀴 돌아 경상남도 진주에 상륙했다. 그리고 7월, 경상남도 합천 대야성이 고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견훤이 몇 차례 공략 끝에 가까스로 점령했던 대야성이었다.
오늘로 따지면 당시 후백제는 충청도 남부와 전라도,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서부 정도를 세력권으로 두었다. 927년 초봄부터 가을까지 벌어진 고려와 신라의 공세는 이 영역을 포위하는 것이 초점이었다. 분명 개경의 왕건과 경주의 경애왕 사이에 수많은 연락이 오갔을 것이고 고려군과 신라군 고위 장교들 간에는 숱한 전략적 검토가 이뤄졌을 것이다. 잘 준비된 멋진 작전이었다.
견훤으로서는 어느 쪽으로든 돌파를 시도하면 다른 쪽에서 반격을 받을 수 있었다. 충남 공주에서 북진하면, 경남 진주와 합천에서 고려군이 전라도를 향해 진격했을 것이다. 진주와 합천 쪽으로 공세를 취하면 반대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고려와 신라는 단단하게 ‘덫’을 쳤다.
그들의 잘못은 견훤에게 선공을 허용한 점에 있었다. 927년 9월. 견훤은 문경으로 치고 올라와 근품성을 다시 빼앗은 뒤 곧바로 상주와 영천으로 향한다. 지금의 상주-영천 고속도로를 따라 진격한 것이다. 견훤은 고려와 신라군이 만든 긴 포위망이 하나의 가느다란 ‘선’로만 구성됐음을 눈치챘다. 병력부족으로 포위망 뒤엔 예비부대가 없었다. 견훤은 후방이 빈 고려와 신라의 약점을 제대로 찔렀다. 천백년 전, 예순이 넘은 노인의 전격전이었다.
견훤은 곧바로 천년고도 신라의 수도 경주로 향했다. 놀란 경애왕은 왕건에 구원을 요청한다. 왕건은 만 명의 군사를 우선 파견한 뒤 자신도 정예기병을 이끌고 경주로 달려간다. 왕건보다 견훤이 좀 더 빨랐다. 기록은 경주에 입성한 견훤이 포석정에 있던 경애왕을 잡아 자살케 하고 군사를 풀어 경주를 약탈하게 했다고 썼다. 신하와 궁녀, 악공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견훤은 경애왕의 처를 욕보였고, 부하들은 빈첩들을 강간했다. 후백제군은 경주를 마음껏 약탈하고 재물을 챙겨 본토로 귀환길에 오른다.
사기가 오른 후백제군은 내려오던 고려군과 대구에서 맞닥뜨린다. 대구 일대의 전투에서 고려는 후백제에 패배한다. 공산 전투다. 고려군 5000여명가량이 사망했고, 왕건이 아끼던 장수 신숭겸은 왕의 투구와 갑옷을 자신이 대신 입고 싸우다 전사했다. 왕건은 병졸의 옷으로 갈아입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후백제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이 전투로 신숭겸을 비롯한 8명의 고려 장수가 전사했다. 8명의 장수가 죽었다고 하여 당시 공산이라고 불렸던 대구의 한 산은 팔공산으로 이름이 바뀐다.
후백제는 이후 고려를 향해 파상 공세를 펼치고 왕건은 수세에 몰린다. 기세가 오른 견훤은 왕건에게 “당신은 내 말의 머리도 보지 못하고 내 소의 털 하나도 뽑을 수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의 누각(을밀대)에 활을 걸고 패강(대동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고려를 흡수합병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패기넘쳤던 견훤의 장담은 왜 현실화되지 못했을까. 가장 큰 원인은 왕건의 생존이다. 패배하긴 했지만 왕건은 살아남았고 고려는 왕건 중심으로 다시 뭉칠 수 있었다. 더 큰 문제는 후백제군이 경주에서 벌인 ‘약탈’이었다. 군대의 사기를 올리는 데에는 도움이 됐지만, 신라 사람들은 경주 약탈사건으로 후백제에 큰 원한을 품었다. 공산 전투 후 견훤은 고려보다 군사적으로는 우위에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위험했던 셈이다. 계속해서 승리했다면 이 정치적 위험도를 낮출 수 있었겠지만, 후백제는 93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벌어진 고창 전투에서 패배했다. 패배 원인 중 하나는 친 신라성향인 안동지방의 호족들이 왕건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전투’에선 이기고 ‘정치’에서는 진 견훤의 전략이 결정적 순간 승패를 가르는 원인이었다. 견훤은 이후 후계자 문제로 아들들과 갈등을 빚다가 장남 신검의 쿠데타로 한 절에 유폐된다. 견훤은 절에서 탈출해 고려에 망명하고 자신의 손으로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전투(일리천 전투)에 지휘관으로 참전한다. 자신의 손으로 나라를 세웠다가 다시 멸망시킨 희귀한 기록을 가진 이가 견훤이다. 고려가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인 936년. 견훤은 등창(종기)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죽기 직전 견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생각 중 하나는 분명 자신의 빛나는 전성기였던 공산 전투였을 것이다. 그는 그때 경주를 약탈한 것을 후회했을까. 왕건을 놓친 것을 후회했을까.
견훤이 가진 희귀한 기록이 천백여년 뒤 한국에 재소환되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를 세운 이수만 전 총괄프로듀서가 자신의 지분을 하이브에 넘기는 계약을 체결하면서다. 하이브가 이수만 씨의 경영 참여를 배제했기 때문에 이씨는 자기 손으로 SM을 하이브에 넘기는 형태가 됐다. 그 이전 SM 경영진은 이수만 씨를 경영 일선에서 배제하는 ‘SM 3.0’ 전략을 발표했다. SM 경영진은 카카오와 전략적 제휴를 맺었고, 이수만 씨는 이에 반발하여 법원에 SM 경영진과 카카오 간 제휴를 중지시켜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그 경영진 중 한 명이 이수만 씨의 처조카인 이성수 대표다. 이 대표는 이수만 씨를 비판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인터넷에선 이수만 씨를 견훤으로, 이 대표를 신검으로, 하이브의 방시혁 대표는 왕건에 비유하는 글들이 올라오기도 했다.
역사는 언제나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 대표는 신검이 아니며 이수만 씨도 견훤은 될 수 없다. 방시혁 대표는 더더욱 왕건이 아니다. 다만 후백제와 고려 간 대결이 현재 SM 인수전에 시사해주는 하나의 가르침은 있다.
명분이 그것이다. SM 인수전은 인수·합병(M&A) 형태로 흘러가고 있다. M&A는 각 회사의 지분 매매로 이뤄진다. 자연히 ‘돈’이 무기다. M&A 시장의 전략과 전술은 ‘돈’을 어떻게 쓰느냐다. 전쟁의 세계에서 ‘도덕’이 큰 변수가 되지 못하듯이 M&A 시장에서도 ‘돈’은 때로 ‘도덕’을 앞선다. SM 인수전은 약간 다르다. SM 경영진, 특히 이 대표는 이수만 씨를 비판하는 동영상을 올렸고, SM 내부 사원들의 움직임도 기사화된다. 이수만 씨의 반응도 나온다. 하이브는 예정보다 앞당겨 SM 주식을 취득했고 “세계 최고의 기업을 만들어 보자”는 비전도 설파하고 있다.
왜 SM과 하이브는 적극적인 ‘여론전’에 나서는 걸까. SM 지분은 1대 주주이자 하이브에 지분을 넘긴 이수만 씨와 국민연금, KB자산운용, 컴투스 등 일부 주주들을 제외하고는 소액주주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2022년 9월 기준, 소액주주들의 지분은 67.46%다. 소액주주들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주주총회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3월에 열릴 예정인 SM 주주총회에선 지난해 말 기준 주식을 가진 주주들이 경영진을 새로 선출하는데 SM 경영진과 제휴한 카카오나 이수만 씨의 지분을 인수한 하이브 모두 지난해엔 SM 주주가 아니었다. 이번 인수전이 대외적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대상이라는 점도 두 회사가 ‘여론전’에 나서는 하나의 이유로 분석된다. SM과 하이브 모두 대중의 ‘꿈’과 ‘희망’이 매출의 주력이다. 이들로서는 도덕적 명분이 ‘돈’일 수도 있다.
현재로썬 3월 주주총회 전까지 SM과 하이브, 또는 카카오 모두 ‘명분’과 ‘도덕’을 잡을 전략을 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단순히 이번 인수전을 돈과 돈의 대결로만 보기는 어려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SM과 하이브 모두 ‘전투’에선 이겼지만, ‘정치’에선 졌던 견훤의 공산 전투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알고 있는 듯하다. 그들 모두 ‘견훤’이 될 수도, ‘왕건’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