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지방 여건 취약” 환자 “인프라 부족해”…의료격차 악순환 [심층기획-붕괴 위기 필수의료 살리자]

(2회) 서울로 몰리는 환자·의사들

인력 부족한 지방 과도한 업무량에 기피
의료 취약지 郡 단위서 市까지 확장돼
비인기 진료과는 광역시도 ‘의료 오지’

전국 소아암 전문의 60%가 수도권 몰려
지방권역센터도 중증수술 의사 태부족
‘내·외·산·소’ 필수 인력 지방불균형 심각

정부 도입예고한 지역수가 세분화돼야
진료과목 외에 지역별 의료상황 고려
지역 거점병원 전폭 지원… 비전 제시도

영남 지역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소아청소년과 A교수는 요즘 일과 시간 내내 외래환자를 진료한 뒤 당직근무까지 서는 날이 허다하다. 의사 수는 적은데 병원은 24시간 돌아가야 해서다. 소아과처럼 전공의가 부족한 ‘기피 과목’ 전임강사와 교수들 업무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병원 소아과 전공의도 한 명뿐인 상황이다. 

 

병원도 곤혹스럽다. 보건복지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소아과 야간진료 확대를 요구하고 있지만 어렵게 모신 전문의들이 업무 가중 등 때문에 개원의 등으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 관계자는 “소아과뿐 아니라 외과, 흉부외과 등 필수의료 부문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의사 수가 줄어들어 근무 여건이 점점 나빠지고, 과한 업무를 못 견뎌 의사들이 떠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토로했다.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를 비롯한 필수의료 분야 인력의 지역별 불균형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이들 과목에 지원하는 전공의들마저 수도권 병원을 선호하는 탓에 지역별 격차는 더 벌어지는 추세다.

◆수도권에 몰리는 환자·병원… 붕괴 위기 몰린 지방 의료

 

의료인력은 임금 이외 자녀 교육과 문화 시설 등 정주 여건이 제대로 갖춰진 대도시로 몰리고, 환자들은 충분한 의료인력과 시설·장비를 갖춘 수도권이나 인근 대도시 병원으로 향한다. 수요가 늘어나는 대도시 병원은 투자를 더하지만, 중소도시 병원은 수요가 적은 필수의료 인력 등을 줄이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대한외상학회 이사장인 박찬용 서울대병원 교수(외상외과)는 27일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예전엔 ‘군’ 단위가 상대적인 의료취약지였는데 지금은 속초나 안동 등 ‘시’까지 확장됐다”며 “비인기 과목은 광역시도 오지가 될 만큼 의료자원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일례로 지난해 기준 전국의 소아암 전문의는 67명이었는데, 서울(29명)과 경기(12명)에 60%가량이 몰려 있고 경북과 강원에는 한 명도 없다. 

 

박 교수는 “중증외상환자를 즉시 치료·수술하는 권역외상센터의 경우 외상외과 전담전문의가 원광대병원과 진주경상대병원은 1명, 안동병원은 2명밖에 없다”며 “당직근무도 짜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의료진의 지역 기피 현상은 내외산소 과목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최근 지방의 한 안과는 서울보다 높은 급여로 전문의 채용 공고를 냈다. 시력교정술과 백내장 수술 등 안과 관련 수술을 매년 5000건 이상 하는 큰 병원이라 환자 서비스 차원에서 의료진 보충을 생각했지만, 지원자는 0명이었다. 병원장은 이후 학교 후배에게서 “요즘 젊은 의사는 대전 이남의 지역으로 가면 가정이나 신용에 문제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며 씁쓸해했다.

 

의료인력과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되면서 이 지역 종합병원으로 ‘원정진료’를 오는 환자는 늘어나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조명희 의원실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수도권 대형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비수도권 거주 환자는 93만명에 달한다. 전년(83만5851명​)보다 6만4000여명(11.3%)이 더 늘었다. 이들이 수도권 상급종합병원에 쓴 진료비는 2조7000억원에 이른다. 대형병원을 비롯해 수도권 병·의원에서 진료를 받은 비수도권 환자도 2020년 약 254만명에서 2021년 약 267만명으로 12만여명(4.8%) 더 증가했다. 

 

이 같은 ‘원정진료’는 한 번 시작되면 더욱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경남에 거주하는 한 60대 환자는 “희귀 질환으로 인해 진료가 가능한 병원이 집에서 2시간 거리”라며 “그 시간에 차라리 KTX 타고 서울 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혈압·부정맥 등 지방에서 관리할 수 있는 병도 이제는 예약 날짜를 맞춰서 서울에서 모두 진료받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수가는 세분화, 지방 거점병원 지원은 확대해야”

 

환자들이 인근 병원 대신 수도권 병원을 선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제공받는 의료 서비스 수준이 지방보다는 서울이 낫다고 생각해서다. 신정환 대한공보의협의회 회장(전남 완도군 대성병원 전문의)은 “완도에서 서울까지 6∼7시간이 걸리는데도 환자들은 서울로 간다”며 “지역 의료기관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신 회장은 “홍보뿐 아니라 지자체에서 의료기관 접근성을 높이고 환자가 유출되지 않도록 막을 필요도 있다”고 했다.

 

지방은 ‘의료 붕괴’라는 말이 나오지만, 신설 병원은 여전히 서울에만 ‘공급’되고 있다. 지난 5년간 수도권 신도시가 지어지는 곳마다 서울 지역 대학병원 분원이 속속 자리를 잡고 있다. 중앙대광명병원(경기 광명)을 비롯해 서울대병원(경기 시흥), 세브란스병원(인천 송도), 아산병원(인천 청라), 인하대병원(경기 김포), 길병원(경기 성남) 등이 새로 문을 열었거나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대한가정의학과의사회 관계자는 “의사 간호사 의료기사 등 신규 의료인력 공급은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집중되고, 경쟁력에 있어 비교할 수 없는 지방 의료기관은 빠르게 정리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는 의료자원의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지역수가’를 도입할 방침이다. 수요는 적지만 없어선 안 되는 진료 과목에 지역에 따라 더 높은 수가를 적용해 의료인력을 유인하겠다는 내용이다. 소아암 지방 거점병원 5곳을 추가로 지정하는 등 필수의료 기반을 넓히는 방안도 내놨다.

지난 26일 강원 속초의료원 응급의료센터 입구에 최근 의료진 공백으로 응급실이 단축 운영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스1

하지만 의료계에서는 세분해서 수가를 가산하지 않으면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신정환 회장은 “전남 목포나 순천처럼 센터와 병원이 충분한 곳보다 완도·해남·강진·고흥·장흥 등 병원이 부족한 곳에 수가를 차등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작정 비수도권 거점병원만 늘릴 게 아니라 병원이 의료인력을 충분히 채용할 수 있게 구체적인 지원책이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대한중소병원협회는 “필수의료를 진료 과목으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진료 행위, 질환명, 지역별 의학적 상황 등을 중심으로 정리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병원의 지속적인 투자와 관련 인력의 꾸준한 유입을 위해서는 적절한 보상이 우선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박찬용 교수는 “상급종합병원 지정 평가 기준에 필수의료 관련 항목을 확대 적용하고, 권역외상센터, 권역응급의료센터 등도 포함해 병원을 유인해야 한다”며 “고사 위기 과목에는 200∼300% 이상의 수가를 적용해 적은 수요에도 비전이 보이게끔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