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칼럼함께하는세상] 모든 엄마의 말

신짜오! 땀비엣! 아이들이 입을 모아 떼창하듯 소리를 질렀다. 지켜보던 베트남 엄마는 박수 대신 눈물이 나왔다고 감격에 겨워 말했다. 말하면서도 그날의 감격이 여전한 눈빛이다. 이제 겨우 인사말을 배웠을 뿐인데 눈물까지 나오는 감격이라니, 그 감격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지난해 주말마다 베트남어와 캄보디아어 교실을 운영했는데 캄보디아 엄마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단어를 몇 개 발음했을 뿐인데 아이 입에서 나오는 크메르어가 그렇게 감동이더란다.

정종운 서울 구로구가족센터장

엄마가 집에서 단어 몇 개씩은 가르쳤을 터이니 단순히 아이들 몇 마디가 대견해서는 아닐 테고, 이 과도한 반응이 궁금해졌다. 뭘까? 당사자들에겐 매우 중요한 이벤트인 것 같은데 쉽사리 공감이 가지 않아 궁금증에 좀 더 머물러야 했다.

 

내 나라에서 나의 언어로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은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감격인가 보다. 그녀들이 한국에 와서 수없이 들었던 주문은 “빨리 한국어 배워서 남편과 소통해라”, “엄마가 한국어를 잘해야 아이 말이 는다”, “집에서 자꾸 모국어 쓰면 아이 발음이 이상해진다“, 심지어 아이의 말이 늦으면 “엄마가 외국인이라 그렇다”고 공식처럼 말했다. 틀린 주문은 아니지만 좋은 주문도 아니었다. 한국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많은 부분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녀라고 말을 배워 능숙하게 대화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매 순간 머릿속에 현란하게 떠오르는 모국어 문장들은 겁먹은 한국어로 둔갑하다 사그라들었다. 모국어라면 유창했을 항변을 한국어로 겨우 말하고 나면 상대방은 또박또박 친절하나 단순하게 말해주었다. 유능감이 사라져 갔고 표현하지 못한 말들이 모여 존재감을 끌어내렸다. 엄마가 눈치 보며 자제하던 모국어를 아이들이 배워서 이렇게 외쳐대고 있으니 울컥했나 보다.

 

엄마의 모국어가 영어였다면 어땠을까? 의사소통에 불편함은 따르겠지만 그 책임을 혼자 지진 않았을 것이다. 영어를 배운 남편도 영어를 배울 아이도 기꺼이 감수하니 말이다. 가끔 영어를 사용하는 필리핀 엄마들이 한국어가 늘지 않아도 늘 쾌활한 건 그들의 성품인지 영어가 주는 자신감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아마 그들에겐 아이들이 영어문장을 길게 말한다 해도 감격이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강점으로 한국어와 부모의 모국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를 꼽는다. 매우 동의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아쉬운 것은 엄마의 말에 따라 대우가 다르다는 점이다. 언어의 활용도와 전망을 가늠해 집에서 권장하고 사교육이라도 받아서 보완할 언어와 집에서도 좀 가리고 자제할 언어로 나뉘어 있다.

 

이중언어가 어디 아이들의 교육과 장래를 위해서만 필요겠는가? 말의 기능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다. 말은 곧 존재감이다. 엄마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그 생기로 아이를 기르는 데 먼저 필요하다. 그런 엄마라야 글로벌 인재로 키우지 않겠나. 모든 엄마의 말이 집마다 웅성거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