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온기를 머금은 수많은 단어가 있지만 그 가운데 유독 가깝고 흔해서 자칫 잊고 살기 쉬운 단어를 고르라면 바로 ‘가족’일 듯싶다.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고 많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서로 속마음을 온전히 내보이기가 구차하게 느껴지듯, 가장 익숙하고도 낯선, 가장 사랑스럽기에 가장 미워할 수밖에 없고, 서로 걱정하면서도 더욱 냉정해질 수 있는, 그래서 가장 가깝고도 먼 이름이 가족이다.
가족은 그 형성 과정이 신비하고도 자연스럽지만 서로에게 굴레가 되기도 한다. 나만의 인생이 아닌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하는 삶이기 때문에 서로 기대만큼 서운하기도 해, 상처 주기 등을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어느새 제 자리에 와 있다. 가족이 갖는 아이러니다. 어떤 엇갈린 길을 가더라도 도착지는 하나다. 가족의 의미다. 이 시대가 간직해야 할 희망이다.
맹성규는 목사인 아버지가 세운 ‘세계로교회’ 건축물을 본떠 세계 여행용 어댑터를 만들었다. ‘세계로 트래블 어댑터’의 구조는 종교적 슬로건인 ‘세계로’가 해체되어 통상적 의미의 ‘세계로’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대만에 거주하는 아버지의 어댑터 사용 영상을 앞뒤로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성장 배경이 된 교회 건물과 아버지의 세계관을 해체, 재조합, 변형하고자 시도한다. 관람자는 아버지가 해석한 어댑터 영상과 작가가 해석한 어댑터 영상을 겹쳐서 바라봄으로써 ‘세계로’가 갖는 아버지-아들의 관점 사이에 서게 된다.
자궁을 뚫고 뻗어 나온 광선과 자궁 주변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맴도는 형상은 작가 민진영 자신의 고단한 싸움과 오버랩된다. 민진영은 연약한 한 인간의 성장을 위한 긴 여정을 위대함의 선상으로 끌어올려 놓았다.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지혜를 ‘연민’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작가의 시선과 연결된다. 자신의 경험적 서사를 담은 ‘Between roof and roof’, 트레싱지를 겹쳐 환부를 가리고자 시도한 드로잉 연작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안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고통 역시 치유하고 있다.
배지인은 가족사진을 들여다본다. 모두 12살 이전의 사진들이다. 누군가의 집, 한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을 법한 앨범 속 사진들이 조금은 왜곡되거나 가려진 채로 그려졌다. 추억의 장면들을 선명하게 밝히거나 흩트리면서 자신의 기억을 찾아간다.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지만, 결국 도착한 곳은 가족이었다고 말하는 작품 ‘꺼지지 않게 조심해’에는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안식처이지만 동시에 불안이 사그라지지 않는 대상들이 가득하다. 인물은 모두 가족, 또는 가족처럼 가까운 이들이다. 작가는 이들의 얼굴을 선명하게 묘사하거나 알아볼 수 없게 지우는 과정을 통해 ‘가족’과 ‘가족처럼 가까운 이들’의 경계를 흐린다.
임윤경은 ‘이름던지기’에서 자신의 가족과 함께 공놀이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관람자는 각각의 등장인물이 서로의 호칭을 호명할 때 그들이 가족인 것을 알게 된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한 개인으로서의 삶보다 우선하는 현재의 가족 구조 안에서, 작가는 가족주의를 걷어내고 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지 질문한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 사이의 거리에서 개인의 자리 찾기와 균형 잡기를 위해 서로의 이름 던지기를 제안한다.
현세진은 ‘지우고 그리고 지우기-나의 방’에서 이혼한 부모 각자의 집에 있는 자신의 방 평면도를 겹쳐 그렸다. 엄마의 집에 있는 작가의 방과 아빠의 집에 있는 작가의 방의 중첩된 구조는 이혼한 부모를 가진 자신의 상황을 나타낸다. 전시장에 횟가루로 그려 겹쳐진 도면은 넘어다닐 수 없는 단단한 벽을 상상하게 하지만, 이는 단지 가루로 그려진 선일 뿐이기도 하다. 작가는 전시 기간 동안 관람자들이 경계를 흩트리거나 선명하게 그릴 수 있도록 작품에 참여시킨다. 가족의 단절을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을 드러내게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가는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구조적, 심리적 변화를 재해석할 수 있는 작가 나름의 경계를 찾아간다.
황예지는 ‘파파 papa’에서 ‘아빠’를 인터뷰한다. 아빠는 말하지 못할, 또는 충분히 설명할 시간이 부족한 사연에도 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대답해 나간다. 아빠는 딸에게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고자 하고, 딸은 오롯이 아빠에게 집중하고 있다. 관람자는 화면 속 ‘파파’를 보고 있지만, 어느새 아빠의 살기 위한 투쟁과 역경을 경청하고 있는 딸의 얼굴을 상상하게 된다. 그의 작업으로부터 가족과 유대하는 방식을 배운다. 각자에게는 힘든 세상이지만 함께할 때 발휘되는 가족의 연대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이 가족에게 가능한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아빠의 “반갑습니다”라는 인사가 우리에게 실마리를 던지고 있다.
서울 금천구 범안로 아트센터 예술의시간에서 4월1일까지 관람객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