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퍼스트레이디 엘리너 루스벨트 자서전/엘리너 루스벨트/송요한 옮김/히스토리아/1만8000원
엘리너 루스벨트는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퍼스트레이디로 꼽힌다.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에 성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이자, 미국 제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로 잘 알려졌지만 그의 정치 역정은 퍼스트레이디라는 수식어로는 부족하다.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던 남편이 소아마비에 걸려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을 때 그는 대통령 선거 유세장뿐 아니라 국제 외교 무대와 2차 세계대전 현장을 누비며 그의 지팡이이자, 눈과 귀가 되어준 정치적 동반자였다. 남편 사후에는 유엔 인권위원회 의장, 칼럼니스트,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더욱 활발하게 인권, 세계평화 운동에 나섰다.
최근 번역 출간된 ‘영원한 퍼스트레이디 엘리너 루스벨트 자서전’은 여느 퍼스트레이디 자서전처럼 대통령 남편의 업적을 칭송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장애를 딛고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다섯 아이의 어머니였던 엘리너가 그의 정치적 파트너로 성장하고, 인권운동가로 독립하는 여정이 담겼다.
◆정치적 동반자로 성장하다
프랭클린이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으로 힘든 미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노변정담’(fireside chat·爐邊情談)을 하는 동안 엘리너는 매달 ‘당신이 나에게 묻는다면’이라는 질의응답 칼럼을 비롯해 신문과 잡지에 칼럼을 꾸준히 기고했다. 그의 칼럼은 미국 정치사와 사회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대공황에 여성 기자들이 새로운 기삿거리를 찾지 못하면 금세 실직한다는 말을 듣고 정기적으로 여성 기자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성 기자들에게 기삿거리를 주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남편의 지지율뿐 아니라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는 효과까지 보게 됐다. 그는 남편 사후에도 30년 넘게 해마다 전국을 다니며 50회 이상의 강연을 하고 TV와 라디오에도 출연했다.
미국 퍼스트레이디 역사는 엘리너 전과 후로 구분된다. 엘리너가 백악관 밖으로 나온 퍼스트레이디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인권운동가로 우뚝 서다
2차 세계대전 종식을 앞두고 프랭클린이 서거하며 엘리너도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듯했다. 그러나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이 앞다퉈 지지연설을 부탁할 만큼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그는 “중년에 이르러 비로소 가족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 나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발전시킬 용기를 얻었다”고 밝혔다.
후임 대통령들의 잇따른 지명으로 엘리너는 유엔 대표와 유엔 인권위원회 의장(1947∼1952)을 역임하며 더 넓은 무대로 나갔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이끌어 냈고, 이런 활동을 포함한 엘리너에 관한 자료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그는 남편 사후에도 유럽 국가뿐 아니라 아시아, 당시 소련까지 혼자 방문해 각국의 지도자를 만나 세계평화와 미국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칼럼니스트 자격으로 소련을 두 번 방문해 직접 흐루쇼프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모두가 그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흑인 인권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공개 강연을 갈 때는 폭탄 공격 위협을 받기도 했고, 각료 인사 때마다 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과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고,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험이 아니라 안정을 가져다줄 일자리를 택하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늘 삶을 모험으로 생각하라. 용감하고 열정적, 창의적으로 살지 않는 한, 능숙함 대신 도전을 택하지 않는 한 안정을 얻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