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이듬해인 1883년 5월 미국의 루셔스 하우드 푸트 초대 특명전권공사가 조선에 부임했다. 당시 미국이 대부분 국가에 영사를 파견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조선에 중국, 일본과 동급의 최고위 외교관을 파견한 것은 파격적이었다. 조선도 주미공사를 파견해야 했으나 수교 직후 임오군란이 발생하고 청의 간섭이 심화해 어려움을 겪었다.
1883년 7월 조선은 외교관 대신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한 사절단을 ‘보빙사(報聘使)’란 이름으로 파견했다. 보빙사는 뉴욕을 방문하여 체스터 아서 대통령을 두 차례 만나 양국 간의 우호와 교역에 대해 논의하였다. 당시 미국 신문에 한글로 작성된 국서가 소개되며, 한글의 존재가 미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조선은 갑신정변 등 국내의 혼란한 상황으로 외교관 파견을 미루다 1887년 박정양을 주미 전권공사로 보냈다.
조선은 임오군란으로 신식 군대 양성이 좌절되자, 1883년 10월부터 장교를 양성하고 근대식으로 군대를 훈련하기 위해 미국에 군사 교관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1888년 미국 정부는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퇴역한 윌리엄 다이 준장 등 4명을 조선에 파견했다. 조선은 국내 최초의 사관학교인 ‘연무공원(鍊武公院)’을 설치하고 이들을 교관으로 임명하여 군사교육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