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간직한 상징 건물…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 [지방기획]

시민품 돌아온 부산근현대역사관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광복 이후 50년간 美문화원으로 사용
인근 韓銀 부산본부 건물 병합 재탄생

옛 건물 리모델링 별관 지난 1일 개관
본관은 보강공사… 2023년 연말 문 열 예정
1만여권의 소장 도서·전시실 등 갖춰

조선 말기부터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6·25 전쟁 등 파란만장한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부산근대역사관이 새 단장을 마치고 박물관 형태로 탈바꿈했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일제강점기 한민족 수탈을 진두지휘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이었다가 광복 이후 약 50년간 미국문화원으로 운영된 부산근대역사관이 인근 한국은행 부산본부 건물을 병합해 ‘부산근현대역사관’으로 재탄생했다.

 

기존 부산근대역사관을 리모델링한 별관은 지난 1일 먼저 개관했으나, 본관인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 건물은 문화재 수리공사 도중 기둥과 보에서 균열이 발견돼 보강공사로 일정이 늦춰지면서 올 연말 문을 열 예정이다.

◆부산근현대역사관의 역사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은 1929년 일제가 서구 양식으로 건축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로, 일제의 부산지역 토지·자원 수탈에 앞장선 곳이다. 광복 이후 미군정에 이양돼 1999년 우리 정부에 건물이 반환되기까지 미국문화원으로 사용됐다.

미 문화원은 각종 음악행사를 비롯한 미술전시와 사진전, 연극·영화, 영어교육 및 문화강좌 등을 통해 지식과 교양을 보급하던 문화거점 시설이었으나,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이 신군부의 유혈진압을 묵인·방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주화를 열망하던 대학생들의 주요 표적이 됐다.

 

1982년 3월 부산지역 대학생들이 부산 미 문화원 현관에 인화물질을 붓고 불을 질러 당시 문화원 도서관에 있던 대학생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화상을 입었다. 이후 수차례에 걸친 대학생들의 점거농성과 건물 진입 시도로 몸살을 앓았다. 이를 빌미로 경찰은 24시간 경비병을 배치해 미 문화원 건물을 방호하다 1992년 11월이 돼서야 완전 철수했다.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은 반미운동에 방아쇠를 당겼다. 전국적으로 반미운동이 확산하자 미국문화원은 1984년부터 ‘아메리칸센터’로 이름을 바꾸고 분위기 쇄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국이 무상으로 사용하는 부지 반환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면서 1999년 4월 마침내 우리 정부를 거쳐 같은 해 6월 부산시로 소유권이 이관됐다.

부산시는 2001년 5월 미 문화원이 서구 양식이 도입되던 시기에 지어져 건축사적 의미가 있는 데다 한국근대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건축물로 판단하고, 부산시 기념물 제49호로 지정했다.

◆역사관으로 조성되는 본관

현재 한창 보강공사가 진행 중인 본관은 2개의 상설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 어린이복합문화공간 등 본격 ‘역사관’으로 꾸며진다.

부산 근현대사의 특색 있는 콘텐츠를 주제로 지역 및 장소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최초 개항지 부산의 역사성과 해양수도 부산의 정체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구성된다.

 

제1전시실은 부산의 매축(바다 매립)과 근대도시 조성, 수탈과 저항, 근대문화와 소비 등 근대도시 조성과정을 집중 조명한다. 개항 당시 부산 사람들의 관점과 일제강점기 고등학생의 이야기, 독립운동가와 남겨진 가족에 대한 이야기까지 시대의 고단함과 아픔, 희망의 이야기로 전시를 풀어나간다.

제2전시실에서는 △피란 수도로 대한민국을 보듬었던 부산 △산업화 시기 모여들고 섞이며 현재 부산이라는 도시를 만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대한민국 민주화의 변곡점이 된 부산 민주화운동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한다.

특히 부산 하면 떠오르는 ‘피란수도·해운과 항만·수산업·산복도로·신발산업과 노동자’ 등 부산만의 특화된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룰 예정이다.

또 젊은 세대들에게 친근한 애니메이션·웹툰·삽화 동영상을 활용하고, 인디밴드와의 협업을 통해 세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맵핑·빔프로젝트 영상을 통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줄 것으로 알려져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이 밖에 어린이와 가족 대상 특별한 공간도 마련된다. 역사를 접목시킨 신개념 놀이터인 ‘어린이복합문화공간(들락날락)’은 어린이 성장 발달에 맞춰 독서·체험·영어 학습 등 다양한 교육·놀이형 콘텐츠들로 구성될 예정이다.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본부 건물로 지어진 뒤, 광복 이후 미국문화원으로 사용된 부산근대역사관이 새롭게 단장을 마치고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으로 거듭났다. 사진은 별관 1층에서 바라본 2층 서가.

◆별관은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

별관은 이력만큼이나 상징성이 큰 건물로, 건축물의 원형을 보존하면서도 격동의 근현대사를 알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된다. 전시를 비롯한 공연과 다양한 책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는데, 기록원과 박물관을 접목한 ‘아키비움’ 방식의 복합 인문·문화공간으로 꾸며진 것이 특징이다.

먼저 1층에 들어서면 부산 근현대사 관련 도서를 비롯한 1만여권의 소장 도서와 아카이브(데이터 저장 파일) 자료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개관 기념으로 ‘부산의 책-시대의 감정, 지역의 얼굴’을 주제로 북큐레이션 전시회가 6월 15일까지 진행된다. 6·25 전쟁 당시 부산에서 출판됐거나, 부산을 다룬 단행본과 잡지 등 40여권을 만날 수 있다.

 

부산 문인 김말봉의 ‘화려한 지옥’과 1954년 창간한 국내 최장수 문예지 ‘현대문학(1954년 4호)’, 현대문학에 실린 김동리의 ‘밀다원시대’와 시인 조병화의 시집 ‘패각의 침실’ 등이 눈길을 끈다. 자료 대부분이 가치가 높은 초판본이자 창간호로, 평소 쉽게 접하지 못하는 색다른 볼거리를 선사할 예정이다.

별관 2층은 건물의 역사와 구조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소규모 전시 공간으로 조성됐다. 특히 천장 마감재로 인해 층높이가 낮아 답답했던 2층 철골 구조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또 동양척식주식회사 당시 1층 느낌을 보여주기 위해 철골철근콘크리트 구조의 대형 원형 기둥을 따라 2층 슬래브(콘크리트 바닥) 일부를 철거해 개방감을 주었다.

가족 친화적인 공간 창출을 위해 1층과 2층에 각각 어린이를 위한 공간과 가족공간을 마련했다. 젊은 세대를 위해 카페 같은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구석구석 포토존을 마련해 공간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쇠퇴한 원도심 활성화 중추 역할 수행

부산근현대역사관은 배움을 강요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시민 누구나 언제든지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휴식공간을 지향한다.

부산관광공사와 연계를 통해 국제시장·보수동 책방골목·아미동 비석마을·임시수도기념관·동아대 석당박물관 등 부산지역 원도심에 산재한 역사문화자원을 체험할 수 있는 도보투어 프로그램 운영으로 전시장 밖의 문화자원을 연결하는 현장형 박물관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특히 역사를 바탕으로 전시와 문화가 접목된 시민 소통공간으로, 지역 인문·문화단체와 협력을 통해 쇠퇴한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거점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는 방침이다.

부산근현대역사관 김기용 관장.

◆김기용 부산근현대역사관장 “역사 이면의 뒷이야기 발굴…문화콘텐츠 강화에 힘쓸 것”

 

“더 이상 박물관은 과거에 머무는 곳이 아니라 역사를 바탕으로 세대와 공감하고 소통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사람을 중심에 두는 부산근현대역사관으로 만들겠습니다.”

 

지난해 11월 부산근현대역사관 초대 관장으로 취임한 김기용 관장은 근현대역사관의 역할 규정부터 분명히 했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뒤, 국가기록원과 청와대 대통령 연설기록비서관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전시운영과장과 학예연구실장 등을 역임한 김 관장은 역사 전문가다.

 

김 관장은 “근현대사 관련 유물이나 자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숨어 있는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다”며 “역사 이면에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발굴해 콘텐츠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부산근현대역사관 개관을 계기로 부산의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기 위해 예산과 인력을 배정하고, 부산근현대역사관 조직에 조사연구팀을 신설했다.

 

국내 근현대역사박물관은 서울을 비롯한 대구와 부산, 목포 등 총 4곳에 건립돼 있으나, 근현대사에 특화된 역사관은 부산이 유일하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이었던 서울은 상대적으로 조선시대 비중이 큰 데 비해 부산과 대구는 근대도시로서 면모를 잘 보여준다.

 

김 관장은 “부산은 대한민국 근현대 역사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은 바다, 뒤는 산으로 둘러싸인 부산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일상이 곧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그는 부산근현대역사관 인근 원도심에 산재해 있는 근현대 유물·유산을 시민과 관광객들이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운영할 계획이다. 또 근현대역사관 내부에 뮤지엄숍이나 카페 등 관광객과 시민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시민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청년작가를 위한 전시·창작 공간도 마련할 예정이다.

 

김 관장은 “쇠퇴한 원도심 활성화가 단순한 개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문화유산과 개발의 접점을 찾아 균형 잡힌 원도심 개발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역할을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