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선] “고등부장 ‘뽕’으로 해결된다고요?”

서울고법 A배석판사는 그날도 여느 날처럼 야근을 했다. 밤 11시를 훌쩍 넘겨 판사실을 나섰다. 법원청사를 막 벗어난 순간 현기증을 느낀 A판사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뜬 그는 인도 위에 홀로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A판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전날과 같이 야근을 했다. 10년 전쯤 일이다. A판사는 이제 법원에 없다. 그러나 그날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눈 떴을 때 그가 보았을 밤하늘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가끔 상상해본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20여년간 법원에 몸담고 있는 B부장판사는 여전히 징검다리 공휴일에도 출근을 한다. 밥과 김치를 조금 넣은 도시락통에 컵라면 하나를 싸 들고서. 숨을 편히 쉬기 힘든 코로나 후유증에도 그는 병가 대신 서둘러 출근하는 쪽을 택했다. “건강 회복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딨느냐”는 기자의 말에 B부장판사는 “재판 당사자들 입장은요?”라고 반문했다. 순간 말문을 잃었다. 그는 법원장 후보로 추천하고 싶다는 후배 판사들의 요청도 정중하게 거절했다.

장혜진 사회부 기자

“어떤 문제는 답이 없는 것도 있는 겁니다. 적응할 수밖에요.” B부장판사는 최근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답변으로 기자를 생각에 빠트렸다.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들어 심각해진 사건 적체의 해법이 무엇이라고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나마 대안에 가까운 것은 국가예산의 0.5%가량인 사법부 예산을 대폭 늘려 시설과 인원을 확충하는 건데, 그건 또 정부와 국회에서 싫어할 것 아닙니까.”



정부가 판사 증원을 위해 지난해 말 국회에 제출한 ‘각급 법원 판사 정원법 개정안’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법관 1인당 사건 수는 426건으로 미국(367건), 프랑스(197건), 일본(152건), 독일(90건)보다 현저히 많다. 보고서는 “구술심리주의, 공판중심주의 강화 및 다수 당사자 사건 등 증가로 판사 업무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며 “이를 줄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판사 출신인 국민의힘 전주혜 의원이 최근 국민의 신속한 재판 받을 권리를 보장하겠다며 ‘재판부별 사건 처리 통계’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하도록 명시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은 이 같은 맥락에서 해결책은 되기 어렵다. 달 대신 손가락을 가리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일각에선 ‘고등부장 승진’ 제도를 되살려 판사들의 ‘고등부장 뽕’(승진 욕구)을 일깨우면 사건 적체가 해결될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미 지나온 과거에나 적합한 믿음이다. 쓰러질 때까지 야근하던 서울고법 A배석판사는 이제 법원에 없고, 코로나 후유증에도 사건 적체를 걱정하며 황급히 출근하는 B부장판사는 예외적인 경우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싸게(예산을 조금만 들여서), 그러나 빠르게(내 사건만은), 고퀄(내가 이기는)’인 판결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하기 어려운 불가능의 영역이다. 결국 주권자인 국민과 대표자인 국회가 ‘사법비용으로 얼마를 투입할 것인지’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