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판소리꾼 이자람 “전통 판소리 젠더·계급 감수성 맞지 않는 내용 너무 많아”

“제 창작 판소리 최대 역작은 ‘노인과 바다’
‘예솔이’ 꼬리표 신경 안 써”

세대에 따라, 좋아하는 공연 장르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떠올리는 예술가가 있다. 50대 이상이라면 ‘예솔아∼할아버지께서 부르셔’로 시작하는 히트송을 부른 귀여운 꼬마 ‘예솔이’로, 판소리·창극을 좋아한다면 소리꾼과 작창가(창을 짓는 사람)로, 인디 음악이나 연극·뮤지컬에 관심이 많은 젊은 세대라면 ‘아마도이자람밴드’ 리더 등 뮤지션이나 배우로 말이다. 누군가에겐 공연예술가나 작가, 작곡가, 음악감독이 더 친숙할 수 있고, 언젠가 대학 강단에 선 교수님으로 불릴 수도 있다. 그야말로 입을 쩍 벌어지게 할 만한 이 재주꾼은 별명도 ‘이잘함’이다. 요즘은 창극 ‘정년이’를 작창한 음악감독의 옷을 입고 있다. 국립창극단 신작인 ‘정년이’는 소리꾼 이야기를 다룬 동명의 인기 웹툰을 창극화한 것으로 오는 17∼29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오는 17일 개막하는 국립창극단의 신작 ‘정년이’에서 음악감독을 맡은 이자람. 국립창극단 제공

천생 소리꾼이지만 ‘창작가’나 ‘공연예술가’라 불려도 좋다는 이자람(44) ‘정년이’ 음악감독을 지난 8일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그동안 근현대 희곡이나 소설을 바탕으로 새 판소리를 창작해온 이자람에게 처음인 웹툰 작창은 어땠는지부터 물었다. “사실 되게 어려워야 하는데 신기하게 수월했고 작창 속도도 (지금까지 했던 작품 중) 제일 빨랐습니다. 주인공이 소리꾼이어서 완전히 감정이입이 됐고, 제 삶도 정년이가 겪은 성장기와 별로 다를 바 없었거든요.”

 

창극 ‘정년이’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티켓 오픈 직후 모든 회차(9회)가 매진됐고, 3회 추가 공연 표도 다 팔렸다. 

 

앞서 이자람은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사천의 선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각각 판소리 ‘사천가’(2007)와 ‘억척가’(2011)로 창작해 국내외 공연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노벨문학상을 받은 대문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의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과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노인과 바다’도 각각 판소리극 ‘이방인의 노래’(2016)와 ‘노인과 바다’(2019)로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특히 지난해 12월 서울 강서구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노인과 바다’는 1300여석 규모의 대극장에 이틀 연속 관객이 가득 찰 만큼 작품성과 대중성을 자랑했다. 이자람은 “다른 사람들은 ’억척가’라고도 하는데 저의 최대 역작은 ‘노인과 바다’”라며 “(제가 배우고 경험한 판소리의) 모든 정수를 정제해 쏟아부어서 음악의 질이 가장 높고, ‘판소리의 격’(판소리의 원형이자 음악적 기본 어법)도 살아 있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이자람은 방대한 원작 소설을 재기 발랄한 상상력으로 압축한 ‘노인과 바다’를 공연할 때 엄청난 에너지와 무대 장악력으로 모든 관객이 드넓은 바다에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자람이 자신의 최대 역작으로 꼽은 판소리극 ‘노인과 바다’ 공연 장면. 이자람은 작은 체구임에도 엄청난 에너지와 무대 장악력으로 모든 관객이 드넓은 바다에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완성 플레이그라운드 제공

그는 이어 “(새 판소리를 만들 때는) 전통 소리꾼이 들어도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판소리 원형이 변형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작업하려 한다”면서 “판소리(원형을) 지키는데 판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리고, 따지고 보면 판소리 맞는 거 (만드는 걸) 제가 참 잘한다”며 웃었다. 

 

‘만능 엔터테이너’인 이자람에게 ‘보통 사람은 한 가지도 제대로 하기 벅찬데 대단한 것 같다. 그런 에너지의 근원이 뭐냐’고 묻자 “저 대단한 사람 아니다”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흥미를 느껴 무언가를 할 때 ‘이자람이니까 잘해야지’라는 생각도,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는 생각도 안 하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일을) 즐길 수 있고, 무대에서도 힘을 빼고 더 잘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대단하다’고 하는 말을 먹기 시작하면 최고가 되려 하고, 그러다 보면 재미가 없어질 것 같거든요. 지금 하는 ‘정년이’ 음악감독도 작가와 연출이 만든 것에 누가 되지 않도록 (음악) 정리를 잘해서 공연을 무사히 올리는 게 제 역할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런 습관 덕에 여러 가지 일을 그냥 깔끔하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비슷한 맥락에서 판소리 대중화나 성평등과 인권·동물권·환경 보호 등 사회적·지구적 이슈와 관련해 ‘뭔가 역할을 해야겠다’는 사명감도 떨쳐냈다고 한다. “제가 좋아하는 일에 온전히 충실할 때 사회적 영향력도 생기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려서부터 국악 대중화에 힘쓰는 일을 했다면 이런 작품들을 못 쓰고 더 화려하거나 더 유명한 작품들만 골랐을 겁니다. 저에게 재미 있고 만들고 싶은 작품을 충실히 만들었더니 사람들도 재미있게 보고 박수를 보내더라고요. 그래서 ‘주제 넘게 뭘 하려 하지 말자’며 사명감을 떨쳐냈어요.” 그는 직접적으로 앞장서거나 목소리를 내지 않지만 판소리 대중화와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고 창작과 공연 등 다양한 활동 과정에서 그런 메시지를 전하곤 한다.  

판소리 다섯 바탕 중 ‘심청가’(1997)를 시작으로 ‘춘향가’(1999·최연소 8시간 완창), ‘수궁가’(2007), ‘적벽가‘(2010)를 완창한 이자람이 이들 전통 판소리를 할 때 지금 시대에 맞게 일부 각색해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춘향가’와 ‘흥보가’도 그렇고, (오늘날) 젠더·계급 감수성과 안 맞는 게 너무 많아 각색하지 않는 한 부르기 어려워요. 그래서 ‘춘향가’를 할 때는 춘향이랑 이몽룡이 서로 존댓말을 쓴다든가, ‘수궁가’를 할 때 별주부 와이프가 스스로를 ’첩’이라고 하는 단어를 뺀다든가 하죠.” 

 

그가 스승 송순섭 명창과 함께 완창한 ‘흥보가’(2015)는 엄밀히 말하면 절반씩 나눠 부른 거라 ‘반창’이지만 굳이 완창 욕심을 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흥보 아내를 깔보고 모욕하는 놀부와 흥보의 언행 등 ‘흥보가’ 내용이 제일 마음에 안 들어 불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판소리 다섯 바탕을 있는 그대로 부르기 힘든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감수성에 맞지 않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바로 잡는 노력을 하면서 찬찬히 들여다 볼 겁니다. 판소리는 (역사적으로) 동시대성을 흡수하면서 사설과 음악 변화 등 재창작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현대적 장르’예요. 저도 그럴 테고 많은 소리꾼이 판소리 다섯 바탕을 토대로 새로운 현재화를 계속 할 거라고 봅니다. 그러면 언젠가 ‘이자람제 판소리’도 나오지 않을까요.” 

이자람이 창작 판소리의 대표 주자가 된 배경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다만 소리꾼들이 자기 만의 판소리를 만들어 무대에 올릴 수 있도록 작가와 작창가, 공연기획자 등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했다. 

 

정작 본인은 직접 글과 창을 짓고 무대에 까지 올리는 능력자다. 이자람은 ‘도대체 못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못하는 게 많다”며 쑥스러워했지만 지난해 말 박사 학위 논문(이자람 창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 연구)까지 썼다. 국립국악중·고교와 서울대 국악과 학사·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자람은 일이 바빠 6년이 지나도록 논문 쓸 엄두를 못냈다고 한다. 솔직히 쓰고 싶지 않았지만 ‘너 같은 애가 꼭 써야 한다’는 지도 교수의 성화에 못이겨 치른 논문자격시험에 떨어지면서 맘이 바뀌었단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논문 쓸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이 판소리 얘기를 하고 다닌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논문 쓸 자격을 갖추기 위해 국악 이론과 역사 등 정말 제대로 공부했어요. (이후 논문 심사에 통과할 때까지) 고생 많이 했는데 엄청 도움이 됐고 좋았습니다.”

 

내년이면 판소리에 입문한 지 35주년을 맞는 이자람은 ‘예솔이’와 떼어놓을 수 없다. 1984년 아버지와 함께 부른 노래 ‘내 이름(예솔아!)’으로 ‘국민 꼬마 스타’가 돼 방송 활동을 하던 중 10살 때 한 어린이 국악 프로그램에서 만난 은희진(1947∼2000) 명창의 제자로 판소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따라다니는 ‘예솔이’란 꼬리표가 지겹거나 부담스럽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요. 사춘기 때나 예솔이가 저보다 더 컸을(큰 존재였을) 때는 (그 이름이) 너무 싫었는데 지금은 뭐 (예솔이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제가(이자람이) 예솔이보다 커진 순간부터는 별로 저한테 영향을 끼치지도 않더라고요.”

그는 ‘뼛속까지 판소리꾼’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꿈을 전하며 판소리 대중화에 갈 길 먼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판소리 속을 잘 아는 ‘귀명창’ 관객들이 가득 찬 공연장에서 추임새를 날려주는 무대에 서보는 게 소원이에요. 조선시대 판소리 공연이 그랬던 것처럼 판소리 한 자락 툭 했을 때 ‘어느 정도 수준이구나’를 바로 알 수 있는 사람이 가득 찬 무대를, 엄청 무섭겠지만 정말 해보고 싶습니다.“

 

그는 공연을 시작하기 전 관객들에게 추임새를 설명한다. 관객들이 ‘편하게 반응하기’란 판소리의 장르적 특성을 이해하면서 공연에 참여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추임새는 소리꾼과 고수의 에너지와 흥, 공연 완성도에도 영향을 준다. “소리를 좀 아는 지금보다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제가 늘 힘있게 나아가는 것 같지만 제 걸음에 추가 엄청나게 많이 달려있다고 느껴서 종종 지쳐요. 대체 언제까지 판소리가 뭐다라고 새로 소개해야 할까요. 관객도 갑자기 많아지는 게 아니라 그냥 뚜벅뚜벅 가면서 조금씩 많아지는 걸 원합니다. 감사하게도 지금 그렇게 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귀명창이 들어찬 공연장) 꿈을 꿔봅니다.”

이자람이 지난해 펴낸 에세이 ‘오늘도 자람’에 새긴 간절함을 소개한다. “나는 가능한 오래, 이 좋아하는 판소리를 관객들과 함께 나누며 살고 싶다.…오만한 마음이지만 진심으로, 이 해내기 만만치 않은 공연들에 빈 좌석을 볼 때면 아까운 마음이 든다. 나 되게 잘하는데. 잘하는 기술로 최선을 다해 깨끗하게 이야기를 들고 올라서는데. 이런 공연이 흔치는 않을 텐데. 좀 오지. 와서 한번이라도 보지.…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한 나의 이름은 한국 판소리 역사에 아주 중요하게 남을 것이니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번이라도 내 작품을 직접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나 이자람 공연 봤어! 나 이자람 살아 있을 때 객석에서 같이 추임새 했어!’ 하고 자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