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 통해 전한 굴렁쇠 감동 ‘서울의 고리’로 이어지려다 무산 표절 시비 휩싸인 ‘서울링’ 조성안 원저작자 노하우 활용해 성공하길
어릴 적 오진희 작가의 만화 ‘짱뚱이 시리즈’ 배경과 엇비슷한 시골에 살았다. 코흘리개 소년에게 굴렁쇠는 훌륭한 놀잇감이었다. 자전거 바퀴에서 타이어와 살(spoke)을 떼어내고 테만 남긴 것이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굴렁쇠를 굴리며 골목길과 들판을 누볐다. 이우영 작가의 만화 ‘검정고무신’에도 굴렁쇠가 소재로 나온다. 굵은 철사로 만든 채로 굴렁쇠를 굴릴 때 사그락사그락 손으로 전해지는 느낌이 선명하다. 맨발 끝에 새겨지던 검은 고무신 자국처럼. 은색 테에 반짝반짝 부딪치는 햇살마냥 소년의 꿈도 빛났다.
굴렁쇠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을 통해 전 세계에 소개됐다. 정적 속에 한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초록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명장면이다. 흰 티셔츠를 입은 소년의 순수함과 원이 굴러가는 화합과 포용의 이미지가 어우러져 큰 감동을 줬다. 시차에 따른 생중계 시간 제약 없이 대낮이 아닌 밤에 열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가장 한국적인 놀이 소재로 세계인에게 감동을 준 인물이 1년여 전 타계한 이어령 선생이다. 그는 올림픽 개·폐막식 총괄기획을 맡았다.
이 선생은 굴렁쇠보다 300배 이상 더 큰 원으로 세상에 감동을 남기려고 했다. 새천년과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서울 상암동 한강변에 세계 최초의 원형 건축물로 ‘서울의 고리(The Ring of Seoul)’를 세우려던 야심 찬 계획이었다.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이던 이 선생과 신현웅 천년의문 재단 이사장이 파리 에펠탑이나 뉴욕 자유의 여신상에 버금가는 서울의 상징물을 만들려고 추진한 프로젝트다.
당시 이은석 경희대 교수와 우대성 건축사가 공동 응모한 작품이 선정됐다. 철골로 짓는 직경 200m의 원형 구조물이다. 고리 안에는 곤돌라 4대와 2000여개 계단이 들어서도록 돼 있었다. 풍동 실험에서 안전 문제가 제기됐으나 우여곡절 끝에 영국 구조설계 회사 도움을 받아 설계에 성공했다. 안타깝게도 정부 입장 선회와 공사비 문제로 무산됐다.
10여년이 지나 2012년 ‘서울의 고리’를 표절한 듯한 높이 157m짜리 ‘생명의 고리(The Ring of Life)’가 중국 랴오닝성 푸순에 세워졌다. 다행이랄까 190억여원을 들여 지은 이 고리는 ‘보고 감상하는’ 조각물(sculpture)에 가깝다. 건축물(structure)이 아니다. “감탄할 만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미끄럼틀’이라는 비아냥도 받는다.
이달 초 서울시가 2027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상암동 하늘공원에 180m의 ‘서울링(Seoul Ring)’을 건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서울시 발표를 보고 바로 ‘서울의 고리’를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대로 표절 논란에 휘말렸다. 우대성 건축사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걸 논란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곤란하다. 명백한 베끼기”라고 단언했다. 서울시는 곤돌라 개수(4개와 36개)와 위치(안과 밖) 차이 등을 들어 표절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세계에 유례없는 고리형 상징물이 한강변에 들어서는 건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차다. 다만 시작부터 표절 시비에 휘말린 모습은 볼썽사납다. 애초에는 ‘싱가포르 플라이어’와 ‘런던 아이’를 모델로 삼은 대관람차 ‘서울아이(Seoul Eye)’ 조성 구상이었다. 지난해 8월 오세훈 서울시장이 싱가포르를 방문해 ‘그레이트 선셋 한강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이게 7개월 만에 살이 없어지고 이름은 ‘서울링’으로 바뀌었다. 이 교수나 우 건축사로서는 저작권을 침해당했다고 여길 만하다.
살이 있는 관람차와 살이 없는 건축물의 차이는 확연하다. 고물상에 널브러진 자전거 바퀴와 이 선생이 작품으로 승화시킨 굴렁쇠의 차이라고나 할까.
고리형 건축물은 중앙이 텅 비어 바람 저항이 큰 탓에 기술적인 구조설계가 아주 까다롭다. ‘서울의 고리’와 차별성만 부각하려다가는 자칫 관람차 쪽에 가까워질 공산이 크다. ‘서울의 고리’를 이어받고 원저작자의 노하우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서울링’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 한강에 놀이 시설과 예술 작품 중 무엇이 들어설지 결정짓는 순간에 서 있다.